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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연합(EU)은 인권외교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일방주의(unilateralism)외교 전통을 지니고 있는 미국이 군사력을 적극 사용해 분쟁을 해결한다면 EU는 ‘소프트파워’로 외교적 해결을 중시하며 무엇보다도 인권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유럽이사회(EU회원국 수반들의 모임)나 각료이사회(회원국 장관들의 모임)모임 이후 발표되는 성명서는 아주 자주 인권존중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며 이런 가치를 전파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수사(rhetoric)와 현실이 맞지 않을 때가 많다. EU의 인권외교가 처한 딜레마를 한번 점검해보자.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무가베를 어찌할꼬
지난 8일부터 이틀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EU-아프리카 정상회담이 열렸다. 7년 만에 열린 정상회담에서 각국 정상은 자유 무역 및 민주주의 증진에 협력하기로 다짐하며 안보와 개발 등 각 부문의 협력을 강조하는 전략적 파트너십 협정에 공동서명했다. 얼핏 보기에 큰 성과가 있는 듯 했으나 이는 표면적인 관찰일 뿐 정상회담 내내 짐바브웨의 인권문제를 놓고 EU와 아프리카 정상들이 입씨름을 벌였다.
  로버트 무가베(1924년생)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짐바브웨에서 게릴라 투쟁활동을 통해 독립을 얻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1980년부터 대통령으로 독재정치를 자행해오고 있다. 야당탄압과 언론자유 탄압, 고문 등 갖가지 억압정치를 시행해오고 있는데 EU는 지난 2002년부터 짐바브웨에 대해 경제제재를 시작했다. 또 무가베 대통령의 EU 회원국내 여행도 불허하도록 각 회원국이 공동정책을 취해왔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을 앞두고 회원국들의 이견이 드러났다. 유럽이사회 순회의장국인 포르투갈은 합의한 공동정책에 따라 무가베를 제외한 나머지 아프리카 국가수반을 초청하려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수반들은 무가베를 배제하면 정상회담에 불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EU회원국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무가베의 참석을 불허하면 7년만에 개최하는 아프리카와의 정상회담이 무산된다. 할 수 없이 포르투갈은 다른 회원국들의 양해를 얻어 무가베 참석을 허용했다. 그러나 유독 짐바브웨를 식민통치했던 영국은 이에 반발하며 EU-아프리카 정상회담에 참석하지 않았다.
반면에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기독교민주당)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적을 만나 문제를 이야기하고 공론화하는 것이라며 회의 내내 무가베를 비판하고 이 문제를 제기했다. 지난 9월 메르켈 총리가 티벳의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를 베를린 총리관저에서 만나면서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됐다. 그러나 메르켈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권외교를 주창하며 적을 만나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물론 같은 대연정내에서도 사회민주당은 인권외교에 약간 다른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 프랑크 발터-슈타인마이어 외무장관(사민당)은 인권외교를 지지하지만 되도록이면 드러내놓지 않고 이 문제를 제기하는 접근법을 취해왔다. 어쨌든 EU-아프리카 정상회담에서 EU는 자신들이 공동으로 합의한 정책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카자흐스탄과 EU
중앙아시아에 있는 카자흐스탄에 대한 EU의 정책도 이와 비슷하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는 현재 56개 회원국을 거느리고 있으며 각 국간의 군비통제와 인권, 선거감시 등에서 협력하는 정부간 기구이다. 서유럽과 동부유럽, 러시아와 구소련 공화국 등 대부분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2010년 카자흐스탄이 일년간 순회의장국을 맡을 차례이다. 카자흐스탄의 대통령은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로 개인숭배를 강요하며 독재정치를 강행해오고 있다. 따라서 EU는 인권외교를 중시한다면 카자흐스탄의 인권을 문제삼아 순회의장국 취임을 저지하거나 이를 지렛대로 사용해 이 문제를 쟁점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원국간의 논란으로 결국 카자흐스탄의 2010년 순회의장국 취임을 승인해야만 했다. 카자흐스탄이 순회의장국이 되면 다른 회원국으로부터 인권개선 압력을 더 크게 받아야 할 것이므로 괜찮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EU가 이 문제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유화책으로 일관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인권외교를 내세우는 EU가 이 문제를 더 잘 다루고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오히려 인권과 경제문제를 연계하지 말고 분리해 다뤄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현재처럼 인권과 경제를 연계해 다루다보니 제대로 한 목소리가 나올 수 없다. EU 각 회원국이 경제적 이익 상충여부에 따라 인권외교에 대한 합의가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라리 경제문제를 분리해 인권외교만을 다루며 인권탄압국에 대해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EU의 인권외교는 비판을 받고 있다. 27개 나라가 한 목소리를 내기가 무척 어렵다.
안병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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