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에서 실종된 예술가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2
2) 나이브 아트(naïve art)의 특징
요즘은 사이비 나이브(pseudo -naïve)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이것은 헨리 루소(Henri Julien Félix Rousseau, 1844-1910)나 알프레드 월리스(Alfred Wallis, 1855-1942)와 같이 정식 예술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나이브 아티스트들의 작품과는 달리, 정식교육을 받았지만 아카데미적인 기법을 사용하지 않고, 나이브(naïve)적인 것을 모방한 예술 작품들을 일컫는 말이다.
Houses at St Ives Cornwall, Alfred Wallis
나이브 아트(naïve art)과 원시 예술(Primitive art)을 혼동하는 경우도 많다. 나이브 아트(naïve art)와 같이 정식 예술 교육을 받지 않은 예술가들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으로 어떤 문화와 관련한 작품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서양의 학문에 비해 사회적으로 기술적으로 원시적(primitive)이라 할 수 있는, 예를 들면 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 아프리카인, 또는 태평양섬의 부족민들과 같은 문화속에서 나온 작품들을 원시 예술(Primitive art)이라 지칭한다.
원시 예술의 예(뱅쿠버 섬의 누우차눌스 인디안의 '태초'를 다룬 아트)
나이브 아트(naïve art)를 원시 예술(Primitive art)과 구별하기 위해 나이브 아트(naïve art)를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는 민속 예술(folk art)이라고도 한다. 사실 나이브 아트와 원시 예술은 아카데미적인 기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
그래서, 나이브 아트(naïve art) 스타일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전문 화가들, 예를 들면, 파울 고갱(Paul Gauguin, 1848-1903), 미크하일 라리오노브(Mikhail Larionov, 1881-1964), 그리고 폴 클리(Paul Klee, 1879-1940)의 스타일을 나비즘(nativism), 프리머티즘(primitiv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3) 나이브 아트(naïve art)의 미술사적 고찰
미술사적으로 나이브 아트(naïve art)를 고찰해보면, 처음에는 아카데미적 교육없이 인간의 본능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인 나이브 아트(naïve art)를 미술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나이브(Naïve) 또는 프리머티브(Primitive )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 프랑스 포스트 인상파 화가 앙리 루소(Henri Julien Félix Rousseau ,1844 – 1910)의 출현을 계기로 이런 스타일의 미술을 미술사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아카데미 미술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꼈던 예술가들이 ‘미술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지고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할 때, 재현을 강조했던 19세기 원근법에 기초한 사실주의에 반기를 들고 미술을 위한 미술을 주장하면서 보편성을 강조했던 20세기 모던니즘(modernism)의 많은 작가들이 나이브 아트(native art)에 눈을 돌리고 매력에 빠지게 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영국의 나이브 아트(naïve art)의 경우, 1930년대 밴 니콜슨이 관심가진 알프레드 윌리스에서 그 색깔을 찾을 수 있다. 영국의 산업 혁명시절 공장 풍경그림을 주로 그렸던 로리(Laurence Stephen Lowry, 1887 - 1976)도 지역의 향수, 정서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나이브 아트(naïve art)적 면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의 나이브 아티스트로는, 독학을 하여 작품 활동을 한, 한국적인 주제를 소박한 서민적 감각으로 다루었던 박수근(1914-1965)과 도쿄 제국미술학교에서 공부를 했지만, 유아적이고 토속적인 감성의 추상화을 그렸던 장욱진(1917-1990)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나이브 아트와는 달리 나이브 아티스트(naïve artist)를 또한 어떻게 정의해야 할 지 다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정식 미술 교육을 받고 나이브 아트(naïve art)적 색깔만 가져도 나이브 아티스트(naïve artist)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이브 아트적 색깔의 경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것일까? 나이브 아트(naïve art)적 색깔의 보편적 개념에 대한 모호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나이브 아트(naïve art)는 그 지역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세계적 보편성을 가지기 힘들다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로리의 영국 산업혁명시절 맨체스처의 공장 풍경 그림을 보고, 한국 사람들이 영국인들이 느끼는 정서와 향수를 느낄 수 있을까는 의문이다.
반대로, 한국인들의 옛 정서를 불러일으켰던 박수근의 빨래터 그림을 보고, 영국인들이 한국인들이 느낀 그 향수를 느끼기 힘들 것이다. 여기서 나이브 아트는 이런 지역적 문화성을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근원성에 바탕을 둔 나이브 아트(naïve art)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의 단순함을 표현하는, 즉 동심이라는 인간의 근본적 감성을 자극 할 수 있기 때문에, 지역성을 극복하고, 문화와 상관없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한계점들이 나이브 아트가 미술사에 편입하는데 문제를 제기한다. ‘어떤 작품을 나이브 아트(naïve art)의 경계안에 있다고 할 것인가?’, ‘그래서 어떤 작가가 나이브 아티스트(naïve artist)로서 미술사에 편입될 수 있을까?,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미술사 편입의 문제는 예를 들어, 현재 영국에서 수백만 파운드의 가치가 있는 로리의 그림이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만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치고, 또한 로리 작품을 한국에서 전시를 한다면 영국에서처럼 향수라는 정서를 자극하는 전시가 아니라, 어떤 보편성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접근을 해야하는지 등의 여러가지 의문들이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3. 선원이었던 나이브 아티스트, 알프레드 월리스(Alfred Wallis , 1855 - 1942)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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