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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자전거나라와 함께 하는 프랑스 에세이 2화

인생이란 그런 거야! 함께라서 더욱 달콤한 벨기에 여행



예년과는 달리 유난히도 일찍 찾아와 따스한 기운을 전해주던 2014년의 봄. 퇴근 길에 열어 본 우체통에는 한국에서 온 하얀 편지 봉투가 담겨있었다. 납작한 동그라미와 전체적으로 키가 작은 필체는 익숙한 것이었고, 반짝이는 은색 스티커를 뜯어내자 그 안 담긴 카드에는 사랑하는 내 친구의 이름이 있었다. 함께 담긴 편지의 시작은 이러했다.

'나의 결혼식에 오지 않을 너에게...'

사랑하는 친구가 결혼을 했다.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며 축하했지만 (그녀의 말처럼) 결혼식에 갈 수는 없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행복한 신부가 된 그녀의 사진을 보며, 유쾌하고 즐거웠던 나의 스무살을 추억한다. 그리고 그 찬란했던 시절의 기억을 나누어 가진 친구들과 함께 떠나고픈 곳으로 망설임 없이 벨기에를 떠올린다. 어설프기만 했던 어른의 이름을 쓴 스무살, 그 시절로의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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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3시간 남짓이면 유럽의 심장이라 불리우는 브뤼셀에 도착한다. 벨기에의 수도이자 유럽연합 본부가 있는 도시답게 첫인상은 웅장하다. 높은 첨탑을 자랑하는 시청사와 고풍스러운 멋을 풍기는 길드하우스들이 이루어 낸 그랑 플라스.

빅토르 위고의 말에 동의한다. 그는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la plus belle place du monde)'이라 예찬했다. 시각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특유의 분위기가 뿜어내는 에너지를 통해 절로 감탄사가 새어 나오는 공간. 높낮이가 다른 건물들이 팔짱을 끼고 나란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듯한 풍경에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겨온다. 차분함 속에 녹아든 미묘한 분주함.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지금과 비슷한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했던 내 스무살의 첫 기억을 꺼내어 본다.

인문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모여든 사람들 사이로 쭈뼛거리던 내 주변에서 나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서 있던 여자애와 스치듯 눈이 마주쳤다. '저 애도 아는 사람이 없구나.' 아마 그쪽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나란히 서서 출석을 확인받고 2박 3일을 함께 보낸 이후로, 그녀와 나는 단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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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환경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그 순간의 어떤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얼마나 큰 발화력을 지니는지 처음 알게 된 순간, 그로부터 9년 후. 내 곁에는 일상까지 함께하는 소중한 동료 가이드들이 있다. 꿈과 열정으로 가득한 이들은 나약한 나를 꼼꼼하게 받쳐주는 울타리나 다름 없다. 파리 도심 속에 숨어있는 파사주를 닮은 생 위베르 갤러리를 지나며 오늘도 여행자들에게 진심을 다해 어떠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그들을 떠올린다. 특별한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통로가 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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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동료들은 벨기에 출신의 만화가 페요(Peyo)가 그려낸 스머프들처럼 각자의 개성이 넘친다. 파파스머프, 똘똘이, 투덜이, 만능이, 주책이, 덩치... 미묘하게 일치하는 캐릭터들이 있어, 초콜릿 가게의 진열대 앞에서 한참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그러다가 문득 초콜릿을 한 상자 구입한다.
우리 집주인 할머니는 폴란드 출신으로, 몇 해 전 부군을 잃고 혼자가 되셨다. 일 때문에 지방으로 떠나있는 딸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며 일은 잘 되어 가는지, 프랑스에 살며 불편하거나 힘든 점은 없는지 늘 궁금해 하신다. 소유가 아니면 월세뿐인 프랑스에서 고약한(!) 집주인을 만나 고생하는 사람들 얘기를 종종 들은터라, 외국인인 나에게 어렵지 않은 조건으로 집을 내어 준 할머니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월세를 내러 들를 때마다 "11구 집은 여전히 거기 있죠?" 라며 진지한 농담을 건네시는 할머니. 소녀같은 미소가 처음부터 낯설지 않았던 것은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와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셨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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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외가에 가면, 잠들기 전에 외할머니께 옛날 얘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마치 이야기 보따리를 가지고 계신 것처럼 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와, 한 이야기가 끝나면 딱 하나만 더 듣고 정말 잠들겠다고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기도 했다.
벨기에는 외할머니의 옛날 얘기 주머니를 닮았다. 복잡하게 이어진 골목 골목마다 눈을 뗄 수 없는 무언가가 깜짝 등장한다. 브뤼셀의 마스코트, 오줌싸개 소년도 작은 골목 모퉁이에 자리한다. 그 앞은 동심어린 표정으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로 늘 붐비는 모습이다.
나는 어느 도시에서나, 유명한 장소에서는 사람들의 얼굴 훔쳐보기를 즐긴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안면 근육을 위로 향한 이들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가장 유명한 무언가를 나도 확인했다는 만족감 어린 미소. 사람들은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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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에서 100km쯤 떨어진 브뤼헤는 마치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아기자기한 매력을 지녔다. 블럭을 조립해 놓은듯한 건물들, 알록달록한 벽돌의 색감,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 마치 산이 없고 사람이 많은 스위스 같다. 벨기에는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니, 다국어를 쓴다는 점도 비슷하다.
브뤼헤 시내의 중심을 이루는 마르크트 광장은 빛의 감성이 가득하다. 노천 카페와 상점, 시청, 우체국... 삶의 생기가 넘치는 평온함. 나는 이렇듯,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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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치즈가 있다면 벨기에는 엄청난 종류의 맥주를 자랑한다. 점심식사를 위해 찾은 레스토랑의 직원은 식사 메뉴판보다 훨씬 두꺼운 맥주 리스트를 턱! 하고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약 400여종의 맥주는 그 농도도 맛도 재료도 발효 방식도 각각 달라, 내 입맛에 맞는 녀석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치 갓 스무살이 되어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을 때처럼, 괜히 설레는 마음으로 쌉쌀한 맥주를 한 잔 주문한다. 각각의 맥주마다 고유의 잔이 있어, 잔이 없으면 맥주가 있어도 내어주지 않는 단호함! 라벨이 없는 비밀스러운 수도원 맥주는 존재만으로도 특별하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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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트 광장에서 출발하는 마차를 타거나, 시내를 관통하는 운하에서 보트를 타고 30여분이면 이 도시를 한 바퀴 둘러보기에 충분하다. 물론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과 도보를 맞추며 걷기에도 그만이다. 프랑스의 그것과는 다른 억양이지만 도란도란 대화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정겹다.
나는 대학시절 학과 공부에 열의가 있는 학생은 아니었다. 내가 '프랑스에'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내가 불문학과를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프랑스어권인 벨기에의 작은 마을을 거닐며 그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에 작은 행복을 느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흐름이 닿는 순간은 의외로 자주 온다.

C'est la vie!
인생이란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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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 곁들인 맥주 기운이 살짝 올라 얼굴이 빨개져 산책을 하다보면 나와 비슷한 상태의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다. 적당한 취기에 흥겨움은 더하고 구시가지의 울퉁불퉁한 돌길마저 재미있게 느껴질 때, 멀리 시계탑의 종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그 소리에 이끌려 다가간 곳에는 이제 막 시청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나오는 신랑, 신부가 하객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먼 발치에서 그들 생에 가장 아름다울 한 순간을 바라보며 다시금 아쉬움이 피어난다. 얼굴을 마주보고 축하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을 다음에 만나 함뿍 그녀를 안아주며 전할 생각으로 다스리며, 내 앞의 커플에게도 축복을 던지며 뒤돌아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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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발길이 닿은 곳은 오후 햇살을 가득 받아 찬란하게 빛을 내는 브뤼헤의 명소, 사랑의 호수. 입맞춤을 나누는 연인들과 그들의 미래같은 노부부의 느린 걸음이 만들어내는 평화로운 풍경의 언저리에 서서, 마치 그곳에 평생을 살았던 사람같은 미소를 짓는 나를 발견한다. 그와 더불어 지금의 내 행복은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 어쩐지 '함께하는 삶'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다.

구두도 화장도 모두 어색하기만 하던 스무 살에 만난 친구가 어느덧 사랑하는 이와 손을 잡고 함께 하리라는 약속을 맺으며 ‘진짜 어른‘이 되었다는 소식에 철 없던(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지난 날의 추억을 곱씹으며 그 때로 돌아간듯 마음껏 거닐고 싶은 자유로움이 충만한 곳, 브뤼셀과 브뤼헤. 닮은듯 다른 한 나라의 두 도시를 둘러보는 하룻동안의 짧은 여행이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시간이다. 학생일 때와 직장인이 된 지금의 나 역시 닮은듯 다르지만, ‘그 시절’의 친구를 만나면 누구든 ‘그 시절’로 되돌아 가는 마법이 일어난다. 파리로 돌아오는 300km는 노곤함이 묻은 단잠으로 쏜살같이 흐르고, 언제보아도 반가운 출발지이자 도착지인 개선문이 다시 돌아온 나를 반긴다.


즐겁고 신나게 맛과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모험, 벨기에.
사랑의 호수에 띄우고 온 작은 종이배가 흘러 흘러 언젠가 그곳에 함께할 우리의 미래까지 닿기를.

글,사진 : 유로자전거나라 박송이 가이드
출처 : 유로자전거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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