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추억에 사로잡힌 화가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2
- 파리에서의 샤갈 -
1906년 정든 고향 비테프스크를 떠난 샤갈은 상페테스부르를 거쳐 1911년 파리에 정착을 한다. 그리고 빠리시 15구에 위치한 아틀리에 '라 휘쉬'(La Ruche, 벌집이라는 뜻)에서 작업을 시작하였다. '라 휘쉬'는 동시대의 전위부대들인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수틴(Chaim Soutine), 아키펭코(Alexandr Archipenko), 레제(Fernand Léger)등의 화가들이 작업을 하고 있던 아틀리에였다.
샤갈은 블레즈 상드라르(Blaise Cendrars), 막스 자콥(Max Jacob), 앙드레 살몽(André Salmon),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같은 시인들과 어울렸고, 특히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던 시인 블레즈와는 깊은 우정을 나눴다. 후에 상드라르는 샤갈에게 바치는 시를 쓰기도 했다.
샤갈은 파리에서 작업하던 이 시기에 야수주의, 입체주의, 오르피즘 등 새로운 시대의 경향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추억과 꿈의 환상적이고 공상적인 피터팬과 같은 자기만의 세상을 예술로 만들어 냈다. 이 당시 젖소와 당나귀와 염소가 그려진다.
1912년 엥데빵당 전시회에 자신이 그린 동물들이 전시된다. 이어 살롱도똔에도 그림을 전시하여 환상적이며 특이한 화풍으로 동시대의 화가들과 시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물론 작품은 팔리지 않았다. 1914년 현대 미술잡지 [슈트름]을 발간한 베를린의 화상 발덴(Walden)의 초대전으로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 화단의 반응을 얻었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나와 마을 (1911)
뉴욕 구겐하임 박물관 소장
그의 커다란 테마는 우선 태어난 고향과, 사랑하는 고향 처녀와의 결혼으로 시작된다,
태어난 고향 비테프스크에서 1915년 평생의 반려자이며 사랑하는 연인 벨라와의 결혼으로 수호천사와 결혼한 인간의 행복을 그리고 있다.
« 그녀가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가 나의 어린 시절과 미래와 현재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나의 아내라는 것을 느꼈다. »
-1923년 나의 인생에서 발췌-
그의 작품의 샘은 사랑하는 여인 벨라로부터 온다. 그의 영혼의 휴식처도 역시 사랑하는 아내 벨라였다. 벨라 여인은 샤갈의 영원한 영감의 근원이었다. 샤갈은 1909년 처음 벨라 레젠펠트를 만났고 1914년까지 약 4년만의 이별 후의 재회는 그리고 다음해 1915년의 결혼은 그 부부에게 아이를 가져다 주었고 사랑과 행복을 주었다. 그의 수호천사는 1944년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다. 미국에서의 벨라의 갑작스런 사망은 화가의 붓을 꺾어 놓게 만들었다. 그를 허무의 어둠 속에 잠기게 만들었다. 하지만 샤갈의 창작의 세계속에 벨라는 여전히 영감을 남기며 살아남아 있다.
산책(la promenade 1917-1918)
산페테스부르그 박물관 소장
1911년과 14년 사이 빠리 체류 시절 샤갈은, 라 뤼쉬(La Ruche) 아틀리에에서 작업하면서 루브르 박물관을 즐겨 찾았다. 그 시절의 샤갈에게 아라공은 « 첼로 남자 »라는 별명을 준다. 음악이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을 지배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는 이곳 빠리에서 당대의 전위 시인 아폴리네르와 블레즈 상드라스를 만난다. 그의 꿈의 세계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푸른 영혼을 잘 모르지만, 그의 불타오르는 새벽 별을 보지 못하지만, 그의 시적인 언어는, 색채 언어는 그의 내제된 환상을 그려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추억의 형태를, 자기 생각의 형태를, 그리고 감정에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그림의 재료, 물감의 관능적인 폭발음, 그림을 그리는 기쁨에 바쳐진 합창시, 태양의 부드럽고 따뜻한 색깔, 그리고 꽃다발은 인생과 사랑을 환기시켜준다.
샤갈은 제1차 세계대전 중 고향에서 수 많은 자화상과 유태인초상화 들의 초상화를 그린다.
1915년 비테프스크에서 아름다운 벨라 로젠펠트(Bella Rosenfeld)와 결혼하여 다음 해 딸 이다(Ida)를 얻는다. 아내 벨라의 교양과 해박한 지식과 사랑은 샤갈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1917년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샤갈은 비테프스크 지역 예술원 위원으로 임명되어 고향에 아카데미와 박물관을 설립하였다.
샤갈은 1920년 모스크바에서 고골(Nikolai Gogol)의 《검찰관》, 숄렘 알레이헴(Sholem Aleichem)의 단막극들의 무대 장치와 의상을 구상했다. 또 모스크바 카메르니 유태인 예술극장의 거대한 벽화 장식을 의뢰 받아 제작했지만 부상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다양한 개념을 갖춘 예술과의 불협화음으로 샤갈은 1922년 가족과 함께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갔다.
창문으로 내다 본 빠리
(Paris par la fenetre 1913년)
1923년 그는 화상 앙브르와즈 볼라흐의 초청으로 베를린에서 다시 빠리로 옮겼다. 볼라흐는 세잔, 흐느와르, 드가의 화상이었다. 화상 볼라흐는 샤갈에게 책의 삽화를 주문하였다. 첫 번째 삽화집은 고골의 죽은 영혼들,그리고 라 퐁텐(Jean de La Fontaine)의 [우화]의 삽화, "볼라흐 서커스"였다.
샤갈은 1926년 뉴욕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1930년에는 샤갈의 영혼을 사로 잡은 바이블의 에스프리와 바이블에 담긴 시를 그리기 시작한다. 바이블은 그를 팔레스타인까지 여행하게 만들었다. 몇 번이나 거부당한 후 1937년에 샤갈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하얀 옷깃의 벨라(Bella au col blanc1917년)
뽕삐두 박물관 소장품
(다음주에 계속)
사계절 옥탑방에서 테오 bonjourbibl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