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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예술칼럼
2017.05.15 00:49
아이 웨이웨이가 제시하는 현대미술의 담론 아이 웨이웨이 3
조회 수 4025 추천 수 0 댓글 0
아이 웨이웨이가 제시하는 현대미술의 담론 아이 웨이웨이 3 5. 아이 웨이웨이가 제시하는 현대미술의 담론 1) SNS 전시회 2006년 아이 웨이웨이(艾未未, Ai Weiwei, 1957-)는 하나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인터넷 블로그를 통한 전시였다. 당시 대형 인터넷 회사인 시나닷컴(sina.com)은 방송인, 개발업자, 출판인 등 많은 문화계 인사들에게 블로깅을 시작해달라고 요청했었다. 이에 어린 시절 어떤 형태로든 표현의 자유를 누릴 기회가 없었던 아이 웨이웨이는 곧 이 블로그에 매료되었다.
그는 하루에 무려 12개 이상의 포스팅과 수천 장의 사진을 올렸다.
블로그는 점점 그의 일상을 담는 다이어리가 되어갔다. 그는 인터넷 기술이 자신의 삶에 일으킨 변화에 대해 흥분하며,
'블로그는 1분마다 전시회를 열 수 있는 놀라운 공간'이라고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Ai
Weiwei's Blog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삶과 개인적인 일상을 기록하면서,
아이 웨이웨이는 블로그를 통해 인간의 조건과 사회 문제, 때로는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견해도 서스럼없이 표현했다.
중국 내에서나 국제적으로나 그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술가임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블로그의 하루 방문자수는 무려 10만 명을 넘어갔다. 그러나, 2008년 아이 웨이웨이는 쓰촨성 대지진으로 사망한 학생들에 대한 조사를 지원하면서 이 조사 작업을 기록한 수많은 글들을 블로그에 올렸고,
이것은 중국 정부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
2009년 5월 그의 블로그는 정부에 의해서 폐쇄되고 말았다. 2) 실수 기존의 만들어진
것을 새로운 예술적 언어로 바꾸어 오던 아이 웨이웨이는, 1995년 한나라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도기 화병을 양 손으로 들고 있다가 일부러 바닥으로 떨어뜨려 깨트리는 퍼포먼스를
행했다.
실수(失手, Dropping a Han Dynasty Urn), Ai
Weiwei, 1995 그 순간을 연속 촬영으로 포착한 흑백 기록 사진을 통해, 그는 이 파괴 행위(vandalism)를 작품으로 제시했다. 제목은 ‘실수(失手,
Dropping a Han Dynasty Urn)’다. 이것은 ‘실수’를 문자 그대로 ‘손을 놓다’라는 뜻으로 해석한 언어유희적 작업의 일종이었다.
가벼운 말장난으로 실수라고
여기기에는 ‘한대(漢代)의 도옹(陶甕)’이란 재료를 썼다는
점에서 참 도발적이다. 중국에는 수많은
고대 문화제가 있기 때문에, 도기 하나쯤은 실수로 마음대로 깨뜨려도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것은
혹시 가짜인가?
그가 이런 의문을 제기한 일은 사실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도발적인 작업을 즐기는 아이웨이웨이는, 이미 1994년 ‘코카콜라상표(可口可樂標誌,
Han Dynasty Urn with Coca-Cola Logo)’라는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Han
Dynasty Urn with Coca-Cola Logo, Ai Weiwei, 1994 서한(西漢)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골동 항아리에 붓으로 코카콜라 로고를 그려 넣은 것이다. 그는 그 뒤로도 이런 작업을 몇 번 반복했었다.
그러다가 2006-7년엔 신석기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들을 화려한 원색의 주택용 페인트에 담갔다가 꺼내는 작업을 개시했다. 이 ‘채색된 도관(彩色的陶罐, Colored Vases)’은 덤벙 분청의 제작 과정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것이 위작품이
아니라면, 이는 문화재 훼손 행위의 일부라는 비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Coloured Vases, Ai Weiwei, 2006 “초기 신석기 시대 도기 전문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저 신석기 시대 항아리는 모두 4천 년 전의 것이지만, 집에 바르는 일본산 공업용 페인트에 담갔다가 꺼내면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져요. 원래 모습은 얇은 또는 두꺼운 페인트 밑으로 감춰지죠. 그래도 사람들은 그걸 알아볼 수 있고, 또 그 때문에 값어치를 높게 평가하지만, 전통적인 골동 시장에서 현대미술의 장으로 자리를 옮겨 어떤 수집가의 소장품이 되거나 경매에 나오게 되죠” 그는 말했다. “도기는 좀 이상해요. 난 도기를 싫어하는데 그래도 도기를 다루죠. 난 어떤 것이 너무 싫으면 그걸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면서 그는 언젠가는 골동 항아리를 보관하는 박물관마저도 항아리처럼 칠하고 싶다고 한다. 3)
“10년 후
피카소가
되어
돌아오겠다” 아이웨이웨이는 25세 되던 해인 1981년에 공항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10년 후 피카소가 되어 돌아오겠다”며 중국 베이징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갔었다.
그는 미국에서 히피(hippie)와 록음악, 마약, 창녀, 예술가들이 밀집한 지역인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East
Village)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의 펑크적 기질과 수시로 일어나는 시위, 자유로운 생활 등은 그의 인생에 큰 나침반 역할을 했다. 이후 20년이 지나 중국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그는 현재 자신의 문화계 거물들과의 인연은 이 이스트 빌리지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1983년 뉴욕(New
York)의 파슨스디자인학교(Parsons
School of Design)에 등록하고 습작을 지속적으로 했었지만, 그는 피카소가 되어 돌아오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다. 입학 후 이듬해 불성실한 학업태도 때문에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 길로 그는 학교를 나와 뉴욕 길거리의 불법거주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1989년 톈안먼사건(天安門事件)을 계기로 미국정부가 대량으로 영주권을 발행한 이후에야 그는 비로소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그는
1980년대 새로운 청년문화예술운동의 거점이었던 이스트빌리지에서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지만, 먼저 뉴욕으로 건너와 활동하고 있던 대만 출신의 미술가 셰더칭(謝德慶,
Tehching Hsieh, 1950-)과 달리, 처음에는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발발했을 때, 그는 ‘중국과의 연대’ 회원들과 뉴욕에서 8일간의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별 이목을 끌지는 못했다. 이후 1990년 초 ‘주목할 만한 신(新) 다다주의 예술가’로서 개인전을 열었고, 한편으로는 조감독의 신분으로
1990년대 중국에서 크게 히트한 드라마 <뉴욕의 베이징 사람(北京人在紐約)>이라는 드라마를 찍기도 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이미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가라기보다는 건달처럼 여겨졌다.
그는 아버지 아이칭의 장례를 치른 이후에도 계속 중국에 머물렀다.
그리고1993년 이후에야 비로소 그의 예술가로서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학졸업장도 없고 돈도 없고 결혼도 못한 20여 년간의 미국생활이었지만,
이것은 그가 자유주의적 정치적 관점과 극도로 전복적인 성격, 국제적인 시야 및 인맥관계를 개척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해 준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흥망을 두 눈으로 지켜봤던 아이웨이웨이는 일단 실험예술가들의 동네를 만드는 일에 주력했다. 우선 그는 1993년 ‘베이징이스트빌리지’를 개척하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1994년부터 1997까지 새로운 현대미술의 담론을 제시하는 전설적 출판물 3종, «검은 표지의 책(黑皮書,
The Black Cover Book)»(1994),
«흰 표지의 책(白皮書,
The White Cover Book)»(1995) «회색 표지의 책(灰皮書,
The Grey Cover Book)»(1997)을 출간했다.
The Black Cover Book, Ai Weiwei, 1994
Ai Weiwei's Little Black Book «검은 표지의 책»의 발간 목적은, 현대예술가들의 작품이 아닌 생각과 개념을 소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셰더칭과 슈빙과 아이웨이웨이의 좌담, 송동, 장환, 황용핑 등 시진 작가들의 작업실을 소개하기도 하고, 마르셀 뒤샹, 앤디 워홀, 제프 쿤스 등의 글과 현대미술계 안팎의 소식도 실려 있었다.
마르셀 뒤샹을 소개하고 있는 The Black Cover Book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국현대미술계의 막후 실력자로 부상한 아이 웨이웨이는, 42세가 되던
1998년에 한스 반 데이크, 프랑크 에이터하겐과 함께 대안적 미술관인 ‘차이나 아트 아카이브 앤드 웨어하우스(CAAW)’를 설립했다. 이듬해에는 베이징 북동부의 차오장디, ‘다산쯔(798)’의 외곽 지역에 대형 스튜디오를 짓고 거기로
이사를 갔다. 이 건물이 바로
작가의 첫 번째 건축 프로젝트다. 이후 그는 7년간 50여 개의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약 90%를 완공해냈다. 이는 보통의 건축가들이 평생에 걸쳐 이룩하는 작업량과도 맞먹는 것이라고 한다.
4) 반체제 예술가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블로그 :
blog.daum.net/sam107 페이스북 : Art
Consultant Jihy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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