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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7.05.15 02:13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18)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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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소설 (18회)

바람의 기억



3. 우림각의 전설 장 마담을 만나다


미친개가 팔을 걷어붙이며 침대에 엉덩이를 털썩 걸쳤다. 매트리스의 거친 출렁임이 정아의 몸에 그대로 전해졌다. 정아는 파충류 모양의 문신으로 가득한 미친개의 단단한 팔을 힐끗 보고는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갚는다니까요.”

정아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미친개가 고개를 모로 틀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씨발, 당연히 갚아야지. 그걸 말이라고 뱉어?”

미친개의 거무스름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꼬리가 심하게 위로 삐친 그의 눈은 흡사 먹이를 노리는 악어의 그것과 흡사해서 소름이 끼쳤다. 정아는 미친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

“안 갚는다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돈이 없으니까, 제 사정이 안 좋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거지. 저도 이런 살인적인 연체 이자 감당하면서 오래 끌고 싶은 생각 조금도 없어요.”

정아는 아까보다 톤을 조금 높여서 조곤조곤 따지듯 말했다. 정아의 말에 그는 오히려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찌푸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좆같은 경우가 있나? 한강에 빠진 년 목숨 걸고 건져주면 왜 죽지도 못하게 하느냐고 성질을 부린다더니, 지금 내가 꼭 그 꼴일세. 내가 언제 당신한테 내 돈 가져다 쓰라고 한 적 있어? 당신 발로 와서 사글세 좀 빌려달라고 사정사정했잖아. 뭐, 살인적인 이자? 참, 나. 스팀 받아 뚜껑 열리겠네. 아줌마, 다른 사채 이자 좀 알아보고 입을 놀려. 그럼 내가 얼마나 양심적으로 이자를 받는지 알 테니까.”

정아도 미친개가 제시한 이자율이 다른 사채업자들에 비해서 낮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연체를 하게 되면 무서운 덫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당시에는 정확히 몰랐다. 연체 시 적용되는 이자가 다른 사채업자에 비해서 오히려 터무니없이 높다는 걸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지금 엄청나게 높은 연체 이자를 물리고 있잖아요.”

“이런 씨발, 내가 연체하라고 애원이라도 했나?”

갑자기 미친개가 주먹으로 침대를 내리쳤다. 정아는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자극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는 밀려서는 안 된다는 오기가 났다.

“은행처럼 연체한 이자에다만 연체 이율을 적용해야지 왜 전체 금액에 그것도 복리로 연체금을 물리냐고요.”

정아가 목소리를 높이자 미친개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정아를 째려보았다.

“그렇게 억울하면 제발 은행으로 가셔. 가까운 은행 놔두고 뭐 하러 면상 더러운 나를 찾아와서 비싼 이자를 쓰셨나? 씨발,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지금이라도 은행가서 대출 상담을 해봐. 은행에서 아줌마에게 단돈 100원이라도 빌려줄 것 같나? 본인이 더 잘 알잖아. 그런 처지를 내가 도와줬으면 매번 고맙습니다, 하고 허리를 굽혀야 맞는 것 아닌가? 나 아니었으면 사글세 없어서 올 겨울 딸내미 데리고 어디에서 눈바람 피하고 살았을 것 같아? 저기 다리 밑, 아니면 지하상가 계단? 어때 예를 들어주니 실감나지?”

정아는 달리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친개의 말마따나 지난 번 살던 집을 비워주고 길거리에 나앉게 될 처지였을 때 이 옥탑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가 도움을 준 덕분이었다. 정아의 사정을 듣고서, 겨울에는 좀 시원하고 여름에는 찜질방처럼 따뜻해도 모녀가 지내기에 그리 나쁘지 않다고 이 옥탑방을 소개해준 것도 그였다.

“이건 어쨌든 이자 폭탄이잖아요.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돈 만들어서 갚을 테니까 제발 이딴 식으로 괴롭히지 좀 마세요.”

“뭐, 이딴 식?”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고 문자 보내고, 허락도 없이 구두를 신은 채로 방으로 들어오고, 게다가 오늘은 이 옷에까지 손댔잖아요.”

정아는 아까 미친개가 가슴을 만진 게 분명했지만 잠결에 벌어진 일인지라 혹시 몰라 옷에 손을 댔다고 돌려 말했다. 미친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가 다시 고개를 뒤로 젖혀서 헛웃음을 날렸다.

“이제 나를 성폭행범으로 모는 거야?”

“누가 성폭행을 했다고 그랬나요? 다만...”

표독스럽게 변한 미친개의 표정이 무서워서 정아는 말을 끊었다. 미친개가 엉덩이를 끌어서 정아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시큼한 입 냄새가 훅 끼쳤다.

“그러니까 이제 막 나가자는 얘기지? 좋아.”

정아는 미친개가 혹시 완력을 쓰는 건 아닌가 싶어 더럭 겁이 났다. 이불을 잡고 있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미친개가 이불을 잡아챘다. 정아의 웅크린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놀란 정아가 재빨리 이불을 당기며 소리를 질렀다. 미친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정아를 노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미친개의 얼굴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했다. 광대뼈 위로 푸르스름한 멍도 보였다.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세상 풍파를 지독하게 겪은 얼굴이라고 정아는 문득 생각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일그러졌던 표정을 풀면서 한쪽 입 꼬리를 씨익 낚아 올렸다.

“우리가 이렇게 핏대 세울 필요가 뭐 있나. 다 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래서 내가 건설적인 제안 하나 하지.”

정아는 부드러워진 미친개의 태도에 귀가 솔깃해졌다.

“우리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를 떠나 남녀 관계로 한 번에 5만원씩 숏타임 어때. 내가 원할 때마다 하는 걸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잖아.”

그러고는 팔을 뻗어 정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정아가 손을 쳐내며 발끈했다.

“이봐요, 내가 창녀로 보여요?”

매섭게 쏘아보는 정아의 기세에 미친개가 주춤했다.

“아니, 뭐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시나. 그냥 흥정 한 번 한 걸 가지고. 막말로 함께 즐기면서 눈 한 번 감았다가 뜨면 5만원인데 그보다 쉬운 일이 어디 있어. 아줌마 저번에 저쪽 마트에서 알바할 때 시급 얼마 받았어. 아마 사천 원도 안 될 걸. 5만원이면 열 시간 넘게 일해야 받는 돈이야. 까짓 거 한 번 한다고 표가 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나는 조루가 있어서 길게도 안 한다고. 그러니 한 번 고민해보고 알아서 결정하셔. 이따 저녁에 다시 올 테니까.”

미친개가 팔을 뻗어 다시 한 번 정아의 머리칼을 쓰다듬고는 몸을 일으켰다. 정아는 문을 나서는 미친개의 뒷모습을 쏘아보다가 세운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미친개의 뺨이라도 후려칠 걸 그랬다는 후회와 함께, 지난 밤 고바야시와 함께 있었던 시간들이 영상처럼 떠올라 오목 가슴이 막힌 듯 아팠다. 혹시 미친개가 어제 고바야시를 따라 호텔로 간 것을 알고서 하는 말이 아닐까 싶어 한숨이 났다.

정아는 이불을 몸에 돌돌 감은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 앞으로 갔다. 건너편에서 낯이 익은 여자가 이편을 바라보았다. 발갛게 충혈이 된 눈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있었다. 정아는 건너편 여자를 쏘아보며 너도 참 한심한 인간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아는 화장대 위 충전기에서 휴대폰을 빼들고 다시 침대로 왔다. 간밤에 호텔에 들어가서 영미에게 연락하려고 했을 때 휴대폰은 이미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여서 차라리 꺼두었다. 휴대폰을 켜자 문자만도 수십 통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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