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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7.07.10 01:03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25)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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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소설 (25회) 바람의 기억 3. 우림각의 전설 장 마담을 만나다 미친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돌아간 것은 아닐 터였다. 오른편 주차장 구석에 눈에 익은 외제 자동차가 보였다. “내가 좀 흥분했지. 어쨌든 정아가 내 질문에 답을 좀 해봐. 그렇게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창밖만 내다보지 말고.” 정아는 얼른 고개를 돌려 자세를 고쳤다. 영미가 손가락으로 정아의 무릎을 쿡 찔렀다. 어서 대답을 하라는 의미였다. 정아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장 마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정아는 이미 우림각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니?” “네, 당장 일자리가 급해서요.” 장 마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아가씨들 좋은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지. 더구나 정아처럼 제대로 공부한 애들은 직장 가지기가 더 어려운 것 같아. 아무래도 기대치가 높으니까.” 장 마담은 마지막 남은 고기 한 점을 상추에 싸서 정아의 입에 넣어주고는 탁자 위의 벨을 눌렀다. 종업원이 다가와 식사 주문을 받았다. 장 마담과 정아가 물냉면을 시켰고 영미는 비빔냉면을 택했다. 종업원이 불판을 정리하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영미가 장 마담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언니, 우리 정아 받아주실 거죠?” 정아는 고개를 들어 장 마담의 입을 주시했다. “글쎄 이건 좀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나나 우림각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정아를 위해서 말이야. 내 욕심으로야 정아 같은 엘리트가 우림각에 들어오는 걸 절대 환영하지. 하지만 영미 너도 잘 알잖아, 이 바닥은 한 번 발을 들여놓았다 하면 다시 돌아나기가 정말 어렵다는 거.” 잔을 들어 입을 축인 장 마담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깨나며 물었다. “근데 학원에서 급여를 얼마나 받았지?” 뜬금없는 질문에 정아는 순간 당황했다. 급여가 얼마였는지 쉬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게 매달 달라서... 등록한 학원생 숫자에 따라 급여를 받았거든요. 근데 근래 일본어 배우려는 사람이 급격하게 줄어서 결국 폐강이 되었어요. 저는 잘렸고요.” 정아는 마지막 달에 받은 급여가 38만원이었다는 말까지는 차마 꺼내지 못했다. 그게 마치 자신의 일본어 실력과 연관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문득 간밤에 고바야시에게 받은 화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고바야시는 애초 더블을 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다. 그가 우림각에 미리 지불한 공정가 25만원과 별개로 오늘 아침 25만원에다 택시비를 하라며 5만원을 따로 주었던 것이다. 어제는 특별한 경우지만 어쨌든 하룻밤 수입이 학원의 한 달 급여보다 많아 마음이 착잡했다. “햐, 학원생이 그리 없구나. 나 다닐 때만 해도 등록이 금방 마감되었는데.” “그땐 그랬지. 정원이 넘쳐서 반을 추가로 편성하고는 했으니까.” “하긴 그때 우림각 아가씨만 해도 500명이 넘었으니 일본어 수요를 짐작할 수 있지. 그땐 급조된 다찌들 상당수가 일본어를 못해서 다들 아침이면 학원으로 달렸어.” 정아의 뇌리에 향수 냄새로 가득했던 오전반 수업이 떠올랐다. 학원에서 가장 넓은 강의실을 사용해야 했던 그 수업은 등록숫자에 비해 실제 강의를 듣는 수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결석자가 많았다. 수업 방식도 다른 반과는 달라서 수강생들이 요구하는 문장을 가지고 실용 회화로 진행되었는데, 대부분의 수강생이 신입 다찌들이다 보니 회화의 내용이라는 게 늘 이런 문답식이었다. ‘쇼핑하러 가실래요?’, ‘이제 호텔로 갈까요?’, ‘먼저 샤워하세요.’, ‘한 번 더 할까요?’, ‘택시비 좀 주세요.’ “그러고 보니 우림각에 지금도 정아 제자들이 많다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구나. 정아가 나타나면 걔들 반응이 어떨지.” “그때 공부한 애들 아직 많지만, 근데 그게 어때서요? 우리 학원 다닐 때도 정아에게 그런 농담 많이 했어요. 우림각에다 학원 분원 열고서 같이 일하자고요. 정아 너도 생각나지?” 장 마담이 영미를 보며 눈을 흘겼다. 정아는 미처 그 생각을 못했다. 장 마담의 지적처럼, 만약 자신이 우림각의 일원이 되면 매일 학원에서 만났던 아가씨들의 수군거림이나 손가락질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처음에는 좀 수군거리겠지만 며칠 지나면 다들 무심해할 거예요.” 영미의 말에 장 마담은 가타부타 반응이 없었다. 정아는 자신에게 일본어를 배웠던 아가씨들의 시선이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쉽지 않겠지만 기회를 주신다면 우림각의 일원이 되고 싶어요.” 정아는 장 마담의 눈을 바라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글쎄다, 욕심이 나는데 좀 찜찜한 이 느낌은 뭘까. 넌 아마도 우림각에서 돈을 좀 모으게 되면 얼른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말하자면 한시적인 비상구 같은 직장으로 말이지. 하지만 현실은 달라. 나도 다찌 생활 딱 3년만 하고 나가서 넥타이 맨 사람들 많이 오가는 길목에다 국밥집을 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 긴 세월 이 바닥에서 검은머리가 흰머리가 되도록 구르고 있잖니.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는 속으로 저는 달라요, 하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지금껏 이 늪에서 보란 듯이 성공한 사례가 떠오르지 않는구나. 고작해야 우림각의 기억을 스스로 지우고 은밀히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애들뿐.” “어머나, 언니도 참, 언니는 이 바닥에서 전설로 통할 만큼 성공하셨잖아요. 그러니 저희에게 힘이 되는 말씀을 해주셔야지요.” “전설은 무슨, 그건 새파란 현역 때 하룻밤 콘돔 몇 개 삼킨 객기를 가지고 부풀린 소문에 불과해.” “아이, 까놓고 말해서 언니가 가진 집이며 건물이며 여러 매장들 전부 합하면 돈이 얼마에요. 그런 부자가 되셨으니 전설이 분명하지요.” “그래봐야 서울 강남으로 가면 아파트를 몇 채나 살 수 있겠니.” “맨 몸으로 그 정도 일궜으면 성공한 거지요. 근데 참 그 소문은 진짜에요?” “무슨 소문?” “언니네 집 변기 막혀서 뜯어보니 배수관이 온통 콘돔으로 콱 막혀있었다는 거. 풍문에 따르면 2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로 두 개가 나왔다고 하던데.” 장 마담이 목젖이 보이게 큰소리로 웃었다. “하여간 소문은 풍선과 같아. 그것도 허풍 좋아한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지. 막힌 배수관에 콘돔 몇 개 나온 걸 가지고 그날 거기서 나온 쓰레기를 모두 콘돔으로 친 거니까.” “아, 실제로 그렇게 나온 건 아니었군요. 근데 왜 하필 잠자리에서 콘돔을 삼키는 객기를 부리신 거예요? 그것도 정액이 들어있는 징그러운 걸 말이에요.” “글세 좀 창피한 얘기지만 그런 저런 객기들이 다 돈 좀 벌어보자고 한 짓이었다. 팁 좀 더 받아보려고 말이야. 처음에는 장난이었는데 그게 대단한 수입원이 될 줄은 몰랐지. 사정이 끝나면 콘돔 벗겨내서 새지 않게 돌려 묶은 다음 그걸 손님이 보는 앞에서 입에 넣고 꿀꺽 삼키는 묘기를 부렸어. 그러고는 이제 내 뱃속에 당신 아이들이 5억 명이나 들어있으니 어떡하면 좋으냐고 실감나게 연기를 펼쳤지. 아마 내일쯤은 다들 배가 고파서 울고불고 난리가 날 거라고 울상을 지으면서 말이야. 그러면 십중팔구는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지갑을 여는 거야. 아이들 식비 여기 있다고 하면서.” “아이고 저런!” 영미가 감탄하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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