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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7.08.27 23:37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31)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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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소설 (31회) 바람의 기억 3. 우림각의 전설 장 마담을 만나다 고바야시는 가운을 벗어 침대머리에 던져두고는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정아는 누운 채로 그의 탄탄한 나신을 힐끗 보고는 창을 향해 몸을 모로 세웠다. 팔을 접어서 베개를 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들끓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겹겹의 파도는 금방이라도 방파제를 넘어트리고 호텔을 덮칠 것만 같았다. 정아는 불쑥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 창에 이마를 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산산이 부서진 파도의 하얀 입자들이 방파제를 넘어와 도로와 호텔을 적셨다. 워낙 기상이 나쁜 탓에 방파제에는 산책에 나선 관광객이나 해녀들, 그 흔하던 낚시꾼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포말로 가득한 방파제는 해녀들이 물질을 오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예전에 물질을 나갔다 실종된 해녀들이 사흘만에 돌아온 현장도 바로 저 아래 방파제였다. 만약 그 해녀들이 오늘 같은 바다 상태였다면 과연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까. 정아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바다를 응시했다. 정아는 돌아서서 욕실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욕실의 유리 너머로 거품을 뒤집어 쓴 고바야시의 몸이 그대로 보였다. 문득, 전에 인수가 체크아웃을 하며 프런트 직원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호텔 시설도 훌륭하고 바다 풍경도 좋은데, 욕실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샤워하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것은 그렇다쳐도 이거 원 용변을 보고 싶어도 민망해서 변기에 앉을 수가 있어야지요. 이 친구는 부끄러워서 이틀 내내 1층 로비 화장실을 이용했어요. 혹시 이 호텔 설계자가 관음증 환자였던 걸까요? 인수의 비아냥에 직원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러잖아도 손님들의 그런 지적이 상당해서 시설 보강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난처해했었다. 하지만 직원의 대답과는 달리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욕실의 투명한 유리벽은 그대로였다. 물론 욕실뿐만이 아니라 침대와 간이탁자며 소파, 화장대와 냉장고도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앉은뱅이 텔레비전이 벽걸이로 바뀐 것과, 이 객실은 인수와 썼던 5층이 아니라 고바야시와 함께 쓸 10층이라는 사실뿐이었다. 고바야시는 허리를 숙여 사타구니 주변을 공들여 씻고 있었다. 정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탁자에서 휴지를 뽑아 혀와 입술을 닦아냈다. 아까 씻지도 않은 성기를 입에 물린 것 같다는 불쾌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정아는 욕실에서 나온 고바야시에게 가운을 건넸다. 고바야시는 가운을 받아 소파에 그대로 던져두고는 정아에게 욕실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정아는 맨몸으로 객실을 누비는 고바야시를 의식하며 돌아서서 옷을 벗었다. 남자들은 여자 앞에서 왜 저렇게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활보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까. 정아는 욕실로 들어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인수도 고바야시처럼 저렇게 맨몸에 성기를 바짝 세우고 시위하듯 객실을 누볐었다. 그때까지 아직 남자와 잠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었던 정아는 인수의 성난 물건을 보면서 저렇게 크고 긴 것이 내 몸에 어떻게 무슨 수로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싶어 더럭 겁을 냈었다. 우려는 현실이 되어서 그날 정아는 통증에 시달리며 시트에 약간의 피를 흘려야 했었다. 정아는 지금도 인수의 몸이 자신의 몸을 어렵게 비집던 순간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하지만 그것이 몸 깊숙이 들어와 완전하게 채워진 이후의 기억은 흐릿했다. 그날 밤 인수는 정아의 몸에 다섯 차례에 걸쳐서 축포를 쏘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창이 부옇게 밝아오는 여명의 시간, 마지막 다섯 번째 연결을 받아들이면서 정아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인수와 평생을 이렇게 고단하게 몸을 연결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면 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하고. 하지만 그가 떠난 이후 밤이 길고 허전하게 느껴질 때마다 그 괴롭힘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정아는 절절하게 실감하곤 했었다. 정아는 거울에 비친 나신을 바라보며 물을 틀었다. 왼 젖가슴에 푸르스름한 멍이 보였다. 지난 밤 고바야시의 입술이 거칠게 다녀간 흔적일 터였다. 정아는 손으로 멍 주위를 쓸어보며 이것이 말하자면 일종의 ‘주홍글씨’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아는 유리벽 너머에서 이편을 주시하고 있는 눈동자를 의식하면서도 부러 굼뜨게 움직였다. 해가 떨어지려면 아직 두세 시간은 족히 남았으니, 오늘은 장시간 시달릴게 뻔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 싶었다. “비행기가 내리지 못할 정도면 눈이 엄청 많이 내린 모양이지요?” 정아가 욕실을 나오며 말했다. “전화했더니 눈이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내리고 있다는군.” 그가 팔을 벌리며 대답했다. “거긴 눈이 많이 내리는 도시인가요.” “해마다 한두 번은 지금 같은 폭설이 있지. 참, 아직 일본에 가본 적이 없다고 했지?” 정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단하게 솟은 그의 하체를 의식하며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일문학 전공자가 한 번도 일본을 방문하지 않았다니 놀랍군. 기회가 되면 내가 한 번 초대를 하겠소.” 고바야시가 정아의 몸에서 바스타올을 걷어내며 말했다. 정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고바야시가 정아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고바야시는 어제와는 다르게 행동했다. 간밤에는 오랜 시간 들판을 헤맨 사자처럼 바로 덮쳐서 단번에 숨통을 끊을 기세로 거칠게 덤볐었다. 지금은 정아를 침대에 눕히고도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마치 유방암을 검진하는 의사처럼 가슴을 만져보기도 하고 아래로 내려가 다리를 벌려서 한참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정아는 눈을 감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시체처럼 굴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너도 즐겨. 그래야 이 바닥에서 오래 버틸 수 있다. 얼른 끝내고 쉬고 싶을 때는 빨리 사정할 수 있게 도와줘라. 그렇다고 과도한 연기는 금물. 고바야시는 여자가 리드하는 걸 좋아하니까 네가 적극적으로 액션을 취하면 도움이 될 거야.’ 아까 택시에서 영미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 말이 생각났다. 마침내 고바야시가 정아의 몸 위로 올라와 유두를 입술로 물었다. 정아는 팔을 뻗어 고바야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아는 지금 자신과 살을 맞대고 있는 이 남자가 인수라고 생각하자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정아는 고바야시가 알아채지 못하게 손등으로 눈가를 스윽 훔쳐내고는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지금 자신의 유두를 물고 있는 이 남자가 고바야시이면서 인수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이 편해지자 긴장했던 몸도 유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바야시의, 아니 인수의 입과 손이 분주해지자 정아의 몸에도 조금씩 열기가 돌았다. 그의 애무는 가슴에서 목덜미로 올라왔다가 천천히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배꼽을 지나 주춤거리던 그가 갑자기 정아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혀가 기습적으로 아래를 파고 들자 정아는 화들짝 놀라 몸을 뒤틀었다. 호텔의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하체를 탐하고 있는 사내의 웅크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아는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렸다. 하늘은 더 어두워졌고 바다는 더 거칠어 보였다. 유리창에 성긴 눈발이 날아와 붙었다. 정아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인수야, 저기 좀 봐, 눈이 내리고 있어. 우리 할머니가 그러셨지. 초야를 치른 다음날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있으면 그 부부는 평생 복을 누리며 산다고 말이야. 근데 우린 왜 그러지 못했을까? 그러자 어디선가 인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우린 여름에 초야를 치렀잖아. 생각 안 나? 저 바다 멀리 수평선에 집어등을 환하게 밝히고 즐비하게 늘어서서 한치와 갈치를 잡던 배들 말이야. 그런 한 여름에 무슨 수로 눈이 내리겠니. 정아는 다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맞고말고. 미안해 인수야, 이렇게 살아서. 마침내 인수의 몸이라고 믿고 싶은 고바야시의 그것이 정아의 몸 깊숙이 파고들었다. 정아는 묵직한 그것이 전진과 후퇴를 거듭할 때마다 이것은 인수가 분명하다고 되뇌며 몸을 뒤틀었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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