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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7.11.26 23:54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43) - 바람의 기억
조회 수 1325 추천 수 0 댓글 0
“다 자업자득이지. 인연이란 때로 어찌 그리도 지랄 같이 엮이는지 원.” 정아가 뜨악한 표정으로 영미를 바라보았다. “순미년이 먼저 나 잡아 잡수셔 하고 꼬리를 쳤대. 지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지.” “그 남자가 먼저 대시를 한 게 아니고?” “그렇다니까. 저기 사거리 해장국집에서 그놈을 처음 봤는데 그 많은 손님 중에 그 놈만 눈에 확 들어와 꽂히더라는 거야. 팔자 더럽게 꼬이려고 헛것이 보인 거지.” “먹는 모습이 섹시해 보였나? 왜 그럴 때 있잖아. 남자들 일하고 밥상머리에 와서 아주 게걸스럽게 푹푹 떠서 먹으면 듬직해 보이는 거.” “아이고, 너도 순미년이랑 비슷한 과구나. 돼지처럼 퍼먹는 게 뭐가 멋지다고, 쯧쯧...” “난 그건 이해가 돼. 순미 씨가 받았다는 섹시한 느낌.” “지랄, 순미년이 그 놈에게 푹 빠진 이유는 그게 아니었어. 아이고, 생각만 해도 추접하다. 이걸 내입으로 말을 해야 하나. 순미년은 그 남자 먹는 모습에 반한 게 아니라 코 푸는 모습에 반했다는 거야.” “코 푸는 거?” 정아가 손으로 제 코를 가리켰다. “그렇다니까. 그 남자가 해장국을 푹푹 퍼먹다말고 탁자 위의 두루마리 화장지를 손에 둘둘 감더니 그걸로 코를 탱 푸는데 그 소리가 마치 벼락이 치는 소리처럼 우렁찼다는 거야. 그 순간 눈앞이 온통 핑크빛으로 바뀌더래. 미친년!” “에이, 설마. 웃기려고 한 소리겠지.” 정아의 대꾸에 영미가 정색했다. “아니야, 나중에 네가 순미년에게 직접 들어봐라. 지 귀에는 그게 그렇게 감미롭게 들렸대. 뿐만 아니라 끈끈한 점도의 액체가 자기 코에 날아와 박히는 느낌이 들면서 입안에서는 달콤한 로얄젤리 향이 퍼지더라는 거야.” “어머, 더러워!” 정아가 얼굴을 찡그리며 진저리를 쳤다. “그 달콤한 향이 신경세포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데 그게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대.” “아유, 그건 진짜 미친 거다.” 정아의 대꾸에 영미가 내 말이,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순미년은 다시 국밥 그릇에 코를 박고 있는 남자를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테이블로 갔대. 가서 그의 인중에 붙은 젖은 화장지 조각을 떼 주고는 술잔을 권했다는 거야. 바로 그날 밤부터 순미년 방 창문에 코가 큰 남자의 실루엣이 비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옆 방 사람들은 밤이면 순미년 앓는 소리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는 거지. 웃기지 않니? 세상에 코 푸는 모습에 반해서 대시를 했다는 게. 코딱지를 한약 환으로 만들어 팔아먹을 년 같으니라고!” 영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주먹으로 제 가슴을 두어 차례 쳤다. 정아는 입술을 깨물어 터진 웃음을 겨우 수습했다. 둘은 다시 복도로 나섰다. 복도의 풍경은 아까보다 한층 분주했다. 계속해서 새 손님이 들어왔고 아가씨들이 줄을 지어 오갔다. 영미가 중앙의 출입문을 밖으로 밀면서 말했다. “지금부터는 연회가 끝난 이후의 코스를 알려줄 게. 손님들을 모시고 우림각에서 호텔로 가면서 꼭 들러야 할 매장들이야. 사실 지금부터가 우리 부수입과 직결된 매우 중요한 거래처니까 잘 기억해야 해.” 영미가 다짐을 받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아는 언젠가 영미로부터 커미션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손님들과 거래처를 돌다보면 어느 때는 거기서 받는 부수입이 화대를 능가한다고 했던가. 쪽문을 나서자 찬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정아는 목도리를 한 바퀴 더 감고 목을 움츠렸다. 둘은 시계 방향으로 담장을 따라 걸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가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도로를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마치 스캔하듯 쓸고 지나갔다. 정아는 주변 가게의 간판과 실내를 찬찬이 살피면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출근을 시작하면 매일 지나치게 될 가게들이니 미리 눈에 익혀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한 발작 앞서 걷던 영미가 몇 차례 뒤를 돌아보다가 기어이 정아의 손을 낚아채듯 잡으며 한마디 했다. “가시나, 장에 가는 나무늘보도 너보다는 빠르겠다.” 영미는 자기를 잘 보라며 앞에서 경보선수처럼 엉덩이를 실룩이며 빠르게 걸었다. 정아도 보는 눈이 없나 주위를 살피고는 영미를 따라했다. 그러는 사이 식당과 주점, 실내사격장이며 작은 슈퍼를 지났다. 이윽고 큰길 사거리 횡단보도를 니은자로 건너, 왼편 첫 번째 골목으로 들어서자 시야가 밝아졌다. 골목 양편으로 눈에 익은 상표를 단 간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몇 개의 가게를 지나치던 영미가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야. 이 매장이 첫 번째 코스.” 영미는 전면이 커다란 통 유리로 되어 있는 숍의 출입문을 밀고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유니폼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가씨 둘이 왼편 계산대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주로 신발과 골프웨어, 가죽제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영미가 손으로 원을 그리자 아가씨 하나가 영미를 계산대 뒤편으로 안내했다. 벽 정면에 커다란 거울이 보였다. 영미가 정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거울 뒤에 숨겨진 매장이 있다. 우림각 손님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 영미가 거울 테두리에 붙은 작은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거울이 회전문처럼 빙그르르 돌았다. 내부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다가 신분이 확인되면 열어주는 거야. 영미가 소곤거렸다. 좁은 통로로 두어 걸음 들어가자 다시 문이 있었다. 영미가 문에 붙은 키에 번호를 찍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본 매장보다 두세 배는 족히 넘는 매장이 나왔다. 진열된 물건의 종류도 본 매장보다 훨씬 많았고 다양했다. 영미가 다시 소곤거렸다. 이게 다 이미테이션이야. 에이급 이미테이션. 정품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정교해서 우림각 손님들이 엄청 좋아해. 영미가 매장을 둘러보라며 정아의 등을 떠밀었다. 정아는 오른편 골프웨어가 진열된 곳으로 갔다. 벽에 붙은 카메라가 정아의 움직임을 따라 바삐 움직였다. “모셔온 손님이 아까 정품 숍에서 물건을 구입하면 정가의 5%, 여기 이 매장에서 사면 매출액의 20%가 아가씨 몫이야. 그러니 손님들이 되도록 이미테이션을 사게끔 유도하는 게 중요해. 앞으로 해보면 알겠지만, 아가씨들 중에 진짜 선수는 여기서 대박을 친다.” “근데 이미테이션을 파는 건 불법이잖아. 걸리면 어쩌려고.” 정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영미를 쳐다보았다. 영미가 걱정도 팔자라며 코웃음을 쳤다. “걸려도 아가씨들은 상관없어. 이곳 주인인 나만 교도소로 끌려가면 되니까.” 정아는 그래? 하는 표정으로 다시 매장을 둘러보다가 불현듯 놀라 영미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이 매장 주인이 누구라고? 너?” 영미가 주저하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정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림각 거래 매장들은 모두 장 마담 것이라고 하지 않았니? 네가 전에 분명히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정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영미가 문가에 선 유니폼 아가씨의 눈치를 살피며 귀엣말로 소곤거렸다. “맞아. 주인은 장 마담이지. 진짜 주인은 강 회장님이고. 나는 다만 바지 사장, 아니 치마 사장이라고 해야 하나.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일종의 총알받이랄까. 단속에 대비한.”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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