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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심원의 사회칼럼
2018.03.12 01:25
영화로 세상 읽기 (1): 나는 악마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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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악마를 보았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는가, 아니면 악하게 태어나는가? 인류의 존재부터 쉼 없는 물음이었고 철학적 다툼이었으나 누구도 속 시원하게 답을 할 수 없는 성선설, 성악설의 양각 대립을 세워왔다. 맹자(孟子)는 성론을 주장했다. 사람의 본성은 원래 선하라다는 주장이다. 반면 고대 중국의 유학자인 순자(荀子)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악하다는 사상이다. 문제는 선과 악의 기준이다. 인류 역사에서 절대적인 선도, 또한 절대적인 악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선이라 주장하는 것이 다른 한 쪽에는 악이 되며, 악은 다시 선으로 둔갑하는 선과악의 순환되어 쉼 없는 시간의 바퀴를 타고 인류사를 이끌어 왔다.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자는 가인이다. 들에서 동생을 돌로 쳐 죽인 것이다. 살인 현장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단순한 살인에 관한 고발이 아니라 인간이 악함을 설명해 준다. 다만 태어나면서부터 악한 것은 유보될 뿐이다. 악한 환경에서 태어났을지라도 얼마든지 선하게 살아갈 수 있다. 반면 선악환경에서도 악한 삶을 사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에게 선과 악은 가치중립적이다. 태어난 아기를 향해 선하다, 혹은 악하다 말할 수 없다. 그냥 귀엽고 예쁜 아기일 뿐이다. 그가 선한 영향을 받으면 선하게 되는 것이고, 악의 영향을 받으면 악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선과 악의 기준을 절대자 하나님을 떠나 것에 기초한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이미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선과 악은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 마치 양과 늑대, 두 마리 짐승이 공존하는 것과 같다. 양에게 먹이를 주게 되면 선하게 되는 것이고,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악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인간의 내면세계와 현실 세계를 조화롭게 연결해야 한다. 그 조화로움이란 재미다. 아무리 탄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재밌게 담아 낼 수 없다면 영화는 실패하게 된다. 영화의 흥망성쇠는 영화의 내용보다는 결국 관객 수가 결정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영화를 두 가지로 판단한다. 재미있는 영화, 재미없는 영화다. 이는 어쩔 수 없다. 대중 매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단순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제작자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자면 재미가 없을 것이고, 재밌는 영화를 만들어내면 깊이가 없는 양날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든 영화는 영화일 뿐인데 영화를 통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는 세상의 이치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인간의 심리와 사회적 속내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늠쇠가 된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영화로 세상을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 동시에 공존해 왔다.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도 악은 잠재되어 있으며,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도 역시 선은 잠재되어 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했다. 어떤 사람이 악한지, 선한지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제작되어지는 영화는 악과 선이 서로 공존한다. 선한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 악인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악하게 생긴 사람이 결과적으로 선한 역을 맡기도 한다. ‘나는 악마를 보았다.’ 는 잔인한 영화다. 극중 인물인 ‘장경철’(최민식 분)은 사람 죽이는 것을 취미 삼는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마다. 그러면서 자신을 악인으로 취급하는 세상을 향해 분노한다. 눈 오는 날 시골 한적한 도로 갓길에 하얀 자동차가 한 대 멈춰서 있다. 바퀴가 펑크가 났기 때문이다. 운전자 여성은 주인공 수현(이병헌 분)에게 상황을 이야기 한다. 둘은 결혼을 앞둔 약혼한 여인이었다. 살인마는 그 옆을 지나면서 도와줄 것을 묻는다. 도움을 거절당한 살인마는 분노하여 수현의 약혼녀인 주연을 토막 살인하여 유괴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의 초반부터 잔인한 장면으로 몸서리치게 한다. 잔인한 장면을 더 잔인하게 느껴지도록 연출을 해야 하며, 연기자는 실존의 살인마 같은 표정과 몸짓을 해야 한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바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주연의 가족관계다. 그의 아버지는 평생을 강력계 경찰로서 퇴직을 한 사람이며, 약혼자는 국정원 경호요원의 팀을 맡고 있다. 아버지는 딸의 장례 앞에서 사위를 붙들고 애통해 한다. 한평생 범인을 잡아 가둘 줄 알았지 내 딸 하나 지키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수현은 약혼녀를 살해한 자에게 천배, 만 배로 갚겠다며 복수하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장경철은 수현에게 도주하면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여 간다. 살인 현장이 확산되자 경찰은 장인에게 수현의 행보를 멈출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악마를 잡기 위해선 수현 자신이 악마가 되어야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그렇게 잔인해도 될까? 영화가 말하려는 의도는 무얼까? 어떻게 보면 장경철의 잔인성, 그 잔인함을 심판하려는 수현의 몸부림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선과 악의 결투라 할 수 있다. 승자는 존재할 수 없다. 승자라 생각하는 순간에 패자가 되기 때문이다. 장경철은 쫓기면서 수현에게 묻는다. ‘누가 승자인가? 누가 이겼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거친 욕과 함께 뱉어진 외침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은 주인공의 눈물 흘리는 얼굴이다. 결국 패자도 승자도 존재하지 않는 모두가 패자인 씁쓸한 회한의 눈물을 담아내고 있다. 잔인한 영화를 보게 되면 그 잔상이 남겨지게 된다. 영화가 그려내는 악마의 모습은 결국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이 악마인 셈이다. 존재 자체가 악마가 아니라 악마적 씨앗을 키운 것이다. 장경철은 최후에 아들과 부모가 보는 가운데 목이 잘려 죽게 된다. 마지막 죽음 앞에 그의 외침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였고 부모를 아끼는 아들의 모습이었다. 악한 속에 선함이 있음이 그려지는 장면이다. 자신의 악하고 처절한 모습을 가족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선과 악은 서로 몸이 하나로 붙어 있다.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선을 키우지 않으면 악은 어느새 잡초처럼 수북하게 자라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악을 향해 돌을 던지지 말고 내 안에 그런 악함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악은 인간에게 주는 반면교사이며 거울인 셈이다. 세상엔 선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예수님조차도 자신을 향해 선한다 말하지 않고 오직 선한 분은 전능자 하나님 한분이라 말씀하셨다. 하물며 인간이 선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거짓말일 것이다. 다만 악을 다스릴 뿐이다. 악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선하게 살려는 몸부림이다. 선과 악을 구분할 분명한 사실은 선은 더디게 자란다는 것이며, 악은 빨리 자란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착하고 선한 말을 배우는 데는 오래 걸려도 욕을 배우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하게 된다. 영화는 말한다. 선한 존재도 악한 존재가 세상에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선함과 악함이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인간이 될 수 있으며, 또한 가장 악한 악마도 될 수 있음을 영화는 세상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기에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 더 많은 땀 흘림과 창조주 앞에 무릎 끓지 않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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