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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2018.05.20 17:19
나는 통일을 반대하지 않았다
조회 수 2474 추천 수 0 댓글 0
나는 통일을 반대하지 않았다 1. 무적의 논리 뜻하지 않게 이른바 키보드 배틀이란 걸 뜨게 된 것 같다.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던 날, 단톡방에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의 전문이 올라왔고,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누누히 묻고 다니던 의문을 한번 더 제시해 봤다. ‘통일은 왜 하려고 하나’ 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내심 그렇게 적을 때부터 이미 다음 전개는 정해져 있었다. ‘왜’냐는 물음에 ‘때문에’ 내지는 ‘위하여’라는 답이 나오게 마련이고,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꼭 통일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지는 ‘통일이 아니더라도 그런 것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라는 식의 답을 하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객관식 시험에서도 ‘모든’, ‘항상’, ‘오직’ 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보기는 종종 답이 아니다. 통일을 해야 한다는 설명에, 내가 ‘꼭 통일만이 답은 아니다’ 라고 한다면 이건 거의 무적의 논리가 아닌가 말이다. 전개는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한국에서 여러 어르신들을 만나뵐 때도 그렇고 영국에서도 제법 많은 경우에 같은 질문을 해 보긴 했었다. ‘통일을 왜 해야 하나요?’ 라는. 다 제쳐 놓고 ‘에이 그래도 통일은 해야지’ 라는 어느 어르신 답변은 수긍할 만 했다. 그래, 그래도 통일은 해야지. 하지만 ‘통일을 왜 하려고 하는가’하는 질문에 ‘국민과 인민이 다 같이 잘 살아보려는 것’이라는 답이 적혀졌을 때,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는 마음에 상처가 생긴 기분이 들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준비해 둔 대로 전개해 보았다. ‘그게 꼭 통일을 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냐’고 물었고, 그는 우리나라의 출산율, 인구 구조, 자본 계층 구조, 남북한 교류, 지정학적 불확실성 해소 등을 섞어 장문의 답을 했다. 종종, 장문의 보기는 객관식 문제의 답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토론 같은 일에서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말은 길면 꼬이기 마련이다. 내가 한마디로 답했다. ‘그러니까, 그게 통일을 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네’. 다시 한번 무적의 논리를 발휘한 셈이다. 꼭 그렇지 않아도 된다, 라는 말은 사실,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된다, 는 양쪽 모두를 커버할 수 있는 얘기니까. 2. 나는 통일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통일이 싫다는 사람도 많아진’ 을 포함한 그의 마지막 글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통일을 반대하지 않았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통일을 찬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마치 통일을 반대한 것처럼 이분법적으로 나눠지는 건 더더욱 원치 않는다. 나는 ‘통일을 왜 하려고 하는가’라고 묻고, 생각해 보기를 원했을 뿐이다. 다시 한번, 나는 통일을 반대하지 않았다. 굳이 내 생각을 말해 보라 한다면 – 사실, 나는 이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럼 너의 생각은 뭐냐’ 라는 식의 질문을 – 나는 두 가지를 말하고 싶었다. 첫째로 통일은 수단이어야 하지 목적이 아니다. 둘째, 통일을 하려면 ‘하면 된다’라는 식으로가 아닌 ‘되면 한다’는 식이 좋겠다, 라는 것이다. 어쨌든 나의 의견이 궁금했다면, 나는 통일을 반대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을 것이다. 통일을 왜 하려고 하는지 궁금해 한다고 해서, 통일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통일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통일은 ‘되면 한다’ 싶을 때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아래에 이어서 쓰고 싶다. 3. 통일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어야 한다. 최근에 요한복음 설교를 두 번 들은 적이 있다. 한 번은 이찬수 목사님 설교, 나머지 한 번은 내가 현재 출석하는 교회의 수요 예배 설교였다. 놀랍게도 서로 유사한 설교였다. 일단 설교 본문 중 요한복음 5장 1절부터 9절까지를 개역개정판으로 그대로 옮겨 보겠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여기에서 핵심적인 사건을 요약해 보자면, 예수님이 38년된 병자를 보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고 물었는데, 병자는 ‘베데스다 못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요.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서 치료를 받고 저는 늦어서 못받아)요’ 라는 답을 한 것이다. 내가 들은 두 설교는 내용이 거의 같았다. 심지어 예수님의 질문이 yes/no question 이었다는 표현도 같았다. 즉, 예수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었을 때, ‘네, 낫고 싶습니다’ 하는 말을 하면 됐을 것을, ‘내가 못에 들어갈 수 가 없다’는 말을 했고, 이 답변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사실 더 어리석은 일은 그가 자신을 고쳐준 이가 예수라는 걸 나중에 겨우 알았다는 것이긴 하다). 아무튼, 그 병자가 38년동안이나 그 못에 남보다 먼저 들어가기를 기다리다가 번번히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다 보니 지치고 낙심했을 법도 하다. 그러다보니 본말이 전도된 상태에 빠져버렸을 법도 하다. 어느샌가 낫기를 원한다는 ‘목적’은 희미해져 잊혀지다시피 하고 못에 먼저 들어가야 한다는 ‘수단’에 절박해지고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이해는 가지만, 낫고자 하는 간절함이야 전달이 됐을지 몰라도, 예수님의 질문에 바른 답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이 설교 본문을 남북한의 통일에 빗대어 보자. 절대자가 물었다. 국민과 인민들아 너희들이 모두 잘 살기를 원하느냐. 국민과 인민이 답하였다. 우리가 통일을 하고자 합니다. 이런 구도가 아닐까.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예수님이 ‘네가 저 못에 누구보다 먼저 들어가기를 원하느냐’ 라고 묻지 않으신 것처럼, ‘너희가 통일을 원하느냐’가 적절한 질문일 것 같지는 않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은 ‘너희가 모두 잘 살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에 상응한다고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분단 70년 된 이 국가는, 아마도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하다 보니38년된 병자처럼 본말이 전도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낫기를 원하느냐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올바른 대답은 ‘네(혹은 아니오)’ 이지 ‘어떻게’가 아니다. ‘다함께 잘 살고자 한다’ 라는 목적이 있다면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지, ‘어떻게 통일을 먼저 할 수 있을까’ 하는 수단을 먼저 기억한다면 대단히 어려워진다. 통일은 다 함께 잘 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여야 하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서는 곤란하다. 통일을 하고 나면 다 함께 잘 살수 있다는 건가 하는 의문이 계속 남는 이유이다. 통일은 목적이 아니다. 수단이라면 수단이다. 4. 통일, 하면 된다? 되면 한다! 통일이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 같으니, 나는 통일 자체를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여기 덧붙여, 그마저도 ‘하면 된다’는 식으로 밀어붙이기가 아닌 ‘되면 한다’ 식으로 힘빼고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역설적이게도 ‘평화협력기원 평양공연 – 봄이 온다’를 방송에서 보고 나서 확고해졌다. 방송을 보고 있던 나에게 조용필의 노래 ‘꿈’과 서현이 불렀던 ‘푸른 버드나무’ 가사가 너무나 대비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면 된다는 식으로 밀어붙이기에 우린 너무 달라져있는것 같았다. 그 가사 만큼이나 말이다. 조용필 노래 ‘꿈’의 가사를 보자.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 그 곳은 춥고도 험한 곳 /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 꿈을 찾아 여기에 /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을 알까 / 나의 꿈을 알까 /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 눈을 감고 싶어 /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자 이젠 서현이 부른 북한 곡 ‘푸른 버드나무’ 가사를 보자. 나무야 시냇가의 푸른 버드나무야 / 너 어이 그 머리를 들 줄 모르느냐 / 뭇 나무 날 보라고 머리를 곧추 들 적에 / 너는야 다소곳이 고개만 수그리네 / 라라라 라라라 푸른 버드나무야 바람결 스치어도 스적이는 나무야 / 어쩌면 네 아지 그리도 부드러워 / 하지만 모진 바람 네 손목 비틀 적에 / 한번도 네 마음 꺾지를 못하였네 / 라라라 라라라 푸른 버드나무야 오늘도 정다웁게 설레이는 나무야 / 어쩐지 우리 마음 네가 다 닮았구나 / 키워준 고마움을 누구보다 네 알아 / 그 뿌리 깊이 내린 이 땅에 절을 하네 / 라라라 라라라 내 조국의 나무야 ‘푸른 버드나무’ 가사는 그 자체로 보면 관조적이고 서정적이다. 여기서 멈춘다면 이 노랫말은 그저 평범한 동시 같아 보이기도 한다. 평범하다는 거다. 감탄할 만한 수준은 결코 아니다. 하긴 모든 노랫말이 대단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물론 서현이 3절까지는 부르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노랫말에 ‘조국’이 들어간다거나, 이 노래를 김일성의 지시로 만들었다거나 한다면 뭔가 달라진다. 세상에,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어야 할 노래가, 누군가의 지시로 정책적으로 만들어지다니. 그렇다 보니 그저 관조적이고 서정적일 가사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모진 바람 네 손목 비틀 적에 한번도 네 마음 꺾지를 못하였네’를 보면 전체적으로 서정적으로 읽혀질 글에서 전쟁의 기운이 느껴질 정도다. 이건 적어도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시라기 보다는 전체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다소 제한하는 ‘진군가’ 종류에 더 가깝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 노랫말을 그저 서정적으로 받아 들인다면 완성도가 떨어지고, 국가적인 무엇과 부합을 시킨다면 순수 예술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순수 예술이 아닌 대부분의 경우 그건 위험하거나 초라해지기 일쑤다. 조용필의 노래 ‘꿈’ 가사는 대단히 놀라웠다. 꿈이라는 것이 아름답게 반짝반짝 빛나는 별과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그런걸 칭송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 꿈을 좇는 사람은 초라한 문턱에 일단 걸린다. 따뜻하고 힘이 나는 꿈을 꾸었겠지만, 그걸 찾아 가는 길은 예상치 못하게 춥고도 험하다. 급기야 꿈을 이루려는 시도조차 어렵다. 오죽하면 ‘문턱’에서 걸리는가 말이다. 더욱이, 거기에서 눈물이 나는데 그 눈물을 흘릴 수가 없을 정도로 아프다.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라는 표현은 눈물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눈물이 밖으로 나와서 입으로 들어가려면 그 눈물은 차갑다. 다시 말해, 꿈을 꾸는 그는 눈물을 흘리지도 못한 채 꾹꾹 삼킨 것이다. 그렇게 눈물을 먹는다. 그런데 여기 자음동화가 일어나서 눈물을 ‘멍’는다. 눈물을 삼키니 그게 ‘멍’이된다. 눈물을 삼킨다가 아닌 눈물을 먹는다는 어휘 선택은 그래서 탁월하다. (‘눈물을 먹는다’는 표현을 바꾸지 않고 두 번 반복한 것을 보면 이러한 해석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이렇게 발음에 관련된 것은 다른 줄에서도 살필 수 있다.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말을 않네’ 라는 가사에서는 연음법칙에 의해서 ‘피’가 발음된다. 세상 곳곳에 ‘피’가 쏟아져 있다. 아마도 눈물을 삼키며 꿈에 멍든 이들이 쏟았을 피였을지, 그들의 상처가 피멍이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토록 춥고 괴롭고 험한 길을 갈 때에 너무나 괴롭고 슬플 때에 저마다는 떠나온 고향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고향의 향기를 맡지 않고 ‘듣는’다. 고향을 떠나왔으니 가장 무디어지기 쉬운 감각이라는 후각이 남아 있을리 없다. 떠나온 고향을 ‘목적’처럼 생각하고 꿈을 꾸는 방법은 고향의 향기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고향의 향기를 기억으로 ‘들어야’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조용필 노래 ‘꿈’의 가사는 대단히 개인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부분이 없다. 개인의 자유가 거의 무제한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아름다운 가사가 나올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지시로 가사를 써야 했다면 이런 노랫말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노래는 피가 낭자하고 온몸이 멍이 드는 춥고도 험한 길에서도 어줍잖은 위로로 격려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노래는 진군가 따위는 결코 아니다. 꿈이 있어서 아프고 힘들다. 그렇지만 그걸 어쩌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에 진정한 힘이 있다. 아주 개인적인. 그렇게 보고 있자니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통일? 그거 ‘하면 된다’ 정신으로 밀어붙이면 되는거 아니냐? 하고 진군가를 부르는 누군가가 있을 때, 내가 말하고 싶어진다. 아니에요. 제발 하면 된다며 밀어붙이지 말아요. 우리 각자 꿈이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힘들어요. 우리 모두 고향이 있을 텐데, 고향을 떠나도 힘들고 돌아갈 고향을 생각해도 힘들어요. 게다가 우린 각자 고향이 다르다구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하면 된다면서 진군가를 부르며 통일을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각자 다른 꿈을 꾸며 눈물을 먹으며 살아가다가, 눈을 감고 고향의 향기를 듣다가 통일을 하게 되면 그 때 하는 걸로 해요. 통일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면, 통일은 수단으로만 남겨 두자구요. 통일 그거, 우리 ‘되면 하는’ 그런 걸로 해요,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5. 북한 사람이 잘 살길 바란다. 영국에서 북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들은 상당히 많은 한국 음식점 주인이기도 하고 종업원이거나 고객이기도 하다. 내 아이들이 속했던 학교에도 한 반에 30명 정원인 학급에 한두 명은 꼭 북한 아이들이 있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도 집사 직분을 받은 북한 사람이 있다. 우리 집에 화장실과 싱크대 손 볼 일이 있었을 때 수리를 해 주신 분도 알고 보니 북한 출신이었다. 내가 아는 분만해도 북한 선교를 하신다고 북한을 다녀온 목사님도 두 분이나 된다. 그들은 영국 시민권자 상태이긴 했다. 은근히 북한은 가까이에 있다. 아무튼 지금 내가 다시 한번 더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시 한번, 통일은 그 자체가 목적은 결코 아니다. 통일은 수단이거나 과정이다. 그나마도 전체주의적으로 ‘하면 된다’는 식이 아닌 ‘되면 한다’는 식으로 기다려야 할. 여기 영국에 있는 북한 사람을 차별하는 한국인들은 사실 많지 않다. 대부분 북한 사람을 대하는 것과 다른 나라 사람을 대하는 것에 차이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통일은 ‘되면 하는’ 걸로 해도 충분할 것 같다. 북한 사람들을 애써 끌어내리지도 않는 것처럼 북한 사람을 서울 사람처럼 대하지도 않는다. 북한 사람이 벤츠를 끌고 다닌다 해서, 그들이 난민 지위를 이용해서 베네핏을 과도하게 받아 산다고 해서, 그들을 해코지 하지 않는다. 최소한 그들이 ‘북한 출신’이라서 어떤 차별을 두진 않는다는 것이다. 통일은 ‘되면 한다’는 식으로 추진하자는 얘기는, 달리 말하면 북한과 북한 사람들이 잘 살길 바란다는 것이다. 꼭 통일 먼저 하고 잘 살기 보다, 먼저 잘 살기부터 하길 바라는 것이다. 그들이 잘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거나 훼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물론 부러워할 것 같지도 않지만. 아무쪼록 그러니까 북한이여, 북한 사람들이여, 부디 잘 살길 바란다. 그렇게 잘 살다가 통일이 될 것 같으면 그 때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 때 ‘너희가 진정 잘 살기를 원하느냐’ 하는 절대자의 질문이 들린다면, ‘우리가 통일을 하고자 하나 비핵화부터 하랍니다’ 라는 동문서답을 하지 말고 ‘네, 함께 잘 살기를 원합니다’ 하는 답을 할 수 있도록 하자. 그러니까, 그렇게 여유가 생길 때까지 잘 좀 살아 보기를 바란다. 그 때 우리 생각해 보자. 통일이라는 걸. 그러니까 통일은 되면 하자. 하면 된다고 밀어붙이지 말고. 다시 한번. 나는 통일을 반대하지 않았다. 영국 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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