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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8.06.20 03:42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69)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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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낮달의 시간 

서울은 한파가 절정에 다다라 수도관이 얼어 터지는 등 피해가 속출하는 모양이었다. 남쪽 지방도 폭설로 비닐하우스가 내려앉고 교통도 엉망이라는 소식이 뉴스의 첫 꼭지를 장식하고는 했다. 그에 비하면 섬의 날씨는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어쩌다 진눈깨비가 흩날렸고 가끔 삭풍이 내달려와 창문을 두드리는 정도였다. 물론 평시보다 기온은 좀 낮았다. 이곳은 겨울이 깊어도 시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드문 데 요사이는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 잦았다. 수은계가 영하와 영상의 한계를 오르내리는 사이 사람들은 다시 두꺼운 옷을 껴입고 종종걸음을 쳤다. 
따뜻하게 옷 단속을 한 영미는 택시를 잡아 경철의 집으로 향했다. 약속대로 차는 빌라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영미는 차의 번호판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어 빌라 3층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경철의 아내가 집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느낌이 문득 들어서였다. 기우였다. 굳게 닫힌 베란다 창에서 행운목 잎사귀만이 이편을 주시하고 있었다. 영미는 어제 저녁 경철에게 받은 비상키를 사용해 차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근처 주유소로 가 기름을 가득 채웠다. 그러고는 계산할 때 받은 무료 세차권을 들고 바로 옆 세차장으로 이동했다. 물이 뿌려지고 세제가 분사되는 모양을 우두커니 지켜보던 영미는 불현듯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일어났어? 차 끌고 와 세차하는 중. 오늘 나 없다고 쓸쓸해하지 말고 씩씩하게 일해. 오늘은 예약이 몇 팀 안 되는 것 같더라, 오프를 쉽게 내줄 때부터 알아봤지. 예약이 적으니 초이스 경쟁이 치열할 거야. 화장 예쁘게 하고 가. 체면 차리지 말고 장 마담 근처에서 맴돌고. 알았지?”
영미는 마치 동생에게 이르듯 조곤조곤 제 할 말만 했다. 저편에서, 나도 너 따라가고 싶은데, 하고 정아가 볼멘소리를 했다.  
“다음에 기회가 있을 거야. 약속할 게. 근데 참, 어제도 미친개가 집에 다녀갔니?”
“그랬더라구. 그래서 나 지금 우울해. 그제는 피자, 어제는 치킨을 사와서 은지랑 먹었대. 은지 이게 내일은 자장면을 먹기로 했다고 이젠 대놓고 자랑을 하는 판이니 내 속이 어쩌겠니.”
정아의 한숨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뒤집어지겠지. 그래도 그 친구 의외로 착한 구석이 있다. 애가 혼자 집에 있는 게 안타까워 그렇게 지성으로 살펴주고 있잖아. 그런 깡패 드물지.”
영미의 차분한 대꾸에 정아가 발끈했다. 
“너까지 왜 그래? 누가 살펴 달라고 사정했나?”
“하긴 모양새가 좀 이상하기는 해. 그 등치에 치킨이며 피자 사다가 은지 먹이는 걸 상상하면 말이야. 어미사슴 잡아먹은 수사자가 젖먹이 새끼사슴을 보살펴주는 것 같다고나 할까.”
“어이구, 비유도 원. ...하여간 난 아주 마음에 안 들어. 잘 다녀와. 아버지께 용돈도 두둑하게 드리고.”
“거긴 용돈 필요 없어. 내가 요양원에 맡겨서 필요할 때 지출할 수 있게 하니까.”
마지막 건조 부러쉬가 요란한 바람소리를 내며 지나가자 부저와 함께 초록불이 들어왔다. 영미는 정아에게 나중에 또 통화하자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차를 몰아 셀프세차 코너로 갔다. 차에서 내려 휴지로 유리창에 남아있는 물기를 훔쳐냈다. 금방 손이 시려왔다.  
가까운 마트로 차를 몰았다. 오늘은 뭘 좀 사가지고 갈까. 양손에 봉지를 든 딸내미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이 떠오르자 기분이 좋아졌다. 
작년 새벽에 화장실을 다녀오다 쓰러진 이후로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지만 정신은 예전 그대로인 아버지. 젊어서 아내를 먼저 보내고 어린 딸과 아들을 길러내느라 등이 휜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영미는 늘 코끝이 아렸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들로 나가 해가 떨어져야 터덕거리는 걸음을 앞세워 집으로 들어오시던 모습이 아프게 떠올랐다.  
카트에 도톰한 내의 두 벌을 골라 넣었다. 작년에 넣어 드렸지만 자주 갈아입으려면 여벌옷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빵모자도 하나 골랐다. 밖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려면 머리가 따뜻해야 하니까. 오리털 파커를 세일한다고 해서 그것도 하나 넣었다. 생리대 진열대로 가서 어른용 기저귀를 골라 카트에 담았다. 근래 전립선에 문제가 생긴 아버지는 밤에 기저귀를 차야 깊이 주무셨다. 
지하 식품 코너로 내려온 정아는 곶감을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전에 무척 좋아했는데 이제는 이가 부실해서 잘 씹지를 못한다. 대신 홍시를 한 박스 샀다. 홍시를 손바닥에 놓고 몇 번 주물럭거려 어느 한군데를 터트린 다음 거기에 입술을 대고 단물을 쪽쪽 빨아 먹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자 영미는 절로 웃음이 났다. 
다시 걸음을 옮기다 수박 앞에서 멈췄다. 이 추운 계절에 어떻게 저리도 크게 자랐을까. 신기한 만큼 가격이 만만치가 않았다. 아버지는 어느 때라도 수박을 사가면 좋아했다. 이가 부실해서 드시기에 만만한 과일이기도 하지만 그걸 좋아하시는 속내는 따로 있었다. 바로 옆방 이화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기 때문. 정아는 고심하다 결국 수박 하나를 골라 카트에 넣었다. 
계산대가 있는 1층으로 가게 위해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도중에 반찬코너가 있어 기웃거렸다. 좋아하는 게장이 보였다. 다음에 꼭 사먹어야지 하고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이번에는 통통한 명란젓이 눈에 들어왔다. 뜨거운 밥에 얹어서 한 입 가득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이것도 다음에 사자, 하고 돌아서는데 마침 저편에서 서 있던 점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종류별로 햄을 잘라 놓고 시식을 권하는 중이었다. 이쑤시개를 받은 영미는 햄 조각 하나를 찍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순간 뭔가 역한 기운이 속에서 훅 올라왔다. 영미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접어 토악질을 했다. 화들짝 놀란 점원이 영미의 등을 두드리며 어쩔 줄을 몰랐다. 영미는 괜찮다고 손을 내저으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1층으로 오르는 동안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계산대에서 지갑을 여는 순간 지갑에서 나는 가죽 냄새가 또 비위를 상하게 했다. 또 구역질이 났다. 영미는 서둘러 카트를 밀고 지하주차장으로 갔다. 트렁크에 물건을 실은 다음 운전석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이게 무슨 일일까. 영미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했다. 맛있는 햄에게, 그걸 권한 직원에게 이 무슨 실례인가. 하얗게 질린 점원의 표정이 떠올라 미안해졌다. 지갑도 그랬다. 우울할 때 지갑을 열고 돈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곤 했는데 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순간 불길한 예감이 밀려들었다. 영미는 의자를 올려 시동을 켠 다음, 차를 거칠게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대로를 달려 병원이 몰려 있는 로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약국 앞에 비상들을 켜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약사에게 임신 테스트용 시약을 달라고 해서 값을 치렀다. 피부가 하얀 남자 약사는 영미의 전신을 스캔하듯 살피며 사용법은 아느냐고 물었다. 영미는 대강 알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약사는 비닐봉지에 넣었던 시약을 꺼냈다. 소변을 보실 때 요령껏 이 시트에 소변을 떨어뜨리세요. 잠시 후 선이 나타날 거예요. 그 선이 한 줄이면 괜찮은 거구요. 두 줄이면 임신 가능성이 높으신 거예요. 한 줄이면 괜찮은 거라고? 영미는 젊은 약사의 말을 머릿속에 굴리며 차로 돌아왔다.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는데 문득 부아가 치밀었다. 젊은 놈이 하는 말본새하고는. 임신 여부가 궁금해서 온 여자에게 한 줄이면 괜찮다니. 내가 임신이 되지 않아야 괜찮은 여자로 보였단 말인가. 설사 밤이슬을 맞고 사는 직업여성으로 보였더라도 그렇게 경우 없이 말하는 게 어디 있는가 말이다. 싸가지 없는 놈 같으니라고. 영미는 약국을 노려보다가 거칠게 핸드브레이크를 풀었다. 
혹시 시약에 두 줄이 그어진다면 어떡하나.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근래 일을 나가서는 분명하게 콘돔을 썼으니까. 딱 하루 안 쓴 날이 있긴 하지만 설마..... 영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기어를 넣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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