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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예술칼럼
2018.08.06 02:19
당신은 지금 무엇을 욕망하는가?
조회 수 1306 추천 수 0 댓글 0
유로저널 174 – 당신은 지금 무엇을 욕망하는가?
욕망은 모든 인간 경험에 있어 핵심적 기능을 한다.
욕망의 대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차일 수도 있고, 이성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또한 직업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그 대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소유한다면 완벽해질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욕망’은 부정적인 어감을 갖기도 한다.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바로 그 아무것도 아님에 우리는 온갖 환상을 그려 넣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브 탕기, Deux fois du noir , 1941
그 환상이 충족되는 꿈이나 몽상, 또는 소망과 염원을 하면서 우리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우리는 완벽한 충족감을 느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모든 욕망을 버릴 수도 없다. 그것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Salvador Dali, Soft
Construction with Boiled Beans, 1936
우리의 욕망이 상상계라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이미지의 세계에서 탈피해 불완전하고 결여로 가득한 상징계로 내쫓긴다고 프랑스 철학자 라깡(Jacques Lacan, 1901-1981)은 말했다. 그는 동시에 우리를 그런 상징계로 유인하는 것은 우리의 환상을 완전히 만족시켜줄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욕망의 대상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라깡
욕망의 궁극적 대상은 실재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상징화에 저항하며 끊임없이 욕망을 지속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라깡은 설명한다.
그럼 이 욕망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조르지오 데 키리코, The Song of Love, 1914
이것은 무의식, 언어 ,사랑, 예술 등 삶의 모든 것을 생각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것은 만족에 대한 갈구도 아니며, 사랑에 대한 요구도 아니다. 이것은 요구와 만족에 대한 갈구의 차이로부터 결과하는 차이이자 그것들 사이에서 생기는 분열의 현상 그 자체이다.
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완벽한 충족도 아닌, 어중간한 것, 즉 결여도 아니며 그렇다고 완벽도 아닌 이 어중간한 것이 바로 상징계라고 라깡은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내쫓기고 있는 이 상징계에서 어중간함을 견디고
나아가는, 신경증 너머의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의 목표라고 했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에서 세 가지 세계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먼저 상상계가 그 첫번 째 세계이다.
이것은 사회와 구별되는 개인의 주체적인 영역을 가리킨다. 우리의 인식이 없으면 어떠한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모두 상상계의 개인인식을 통해 개인에게 받아들여진다. 이런 의미에서 상상계는 인간 개인에게 가장 근본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상상계의 반대에 상징계가 있다. 상징계는 말그대로 현실의 영역이다.
라캉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사회의 의미화를 벗어나려는 개인의 투쟁으로 파악했다. 즉, 그는 상상계가 상징계에 처음 포섭되는 과정은 상징계의
일방적인 우위로 이루어지며, 이후에도 상징계는 상상계보다 앞서 상상계의 의미를 규정지으며 절대적인 위치에 남아있으려고 한다.
라캉에 있어 '욕망'이라는 개념도 이 지점에 있다. 상징계가 상상계를 포섭하는 과정은 상징계(사회)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상계(개인)가 궁극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위치는 남아있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상상계, 즉 개인은 '결여'라는 감정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상상계는 자신과 세계의 안정적인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지점을 계속 꿈꾸게 되고, 이것이 바로 욕망이라는 형태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캉에 있어 '욕구'와 '욕망'은 아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욕구는 말하자면 상징화에 앞선 지점에 있고, 욕망은 상징화 이후에 등장한다. 예를 들어, "밥을 먹고 싶다"처럼 본능적이고 필수적인 것은 욕구이다.
그리고, "누구누구와 같이 즐겁게 밥을 먹고 싶다. 그러면 정말 행복할텐데”라는 것은 욕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라깡에 따르면, 욕망은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실재계라는 개념을 설명했다.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실재계는 상징계의 의미화 작용이 실패로 돌아가는 지점을 가리킨다.
Max Ernst, Compendium of the
history of the universe, 1953
실재계는 상징계가 말할 수 없는 영역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스스로 절대적인 위치라고 말하는 상징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Max Ernst, The Sea (Marine), 1928
그런데 문제는 이 개념의 정확한 위치이다.
실재계가 상상계(개인)과 상징계(사회)를 모두 넘어선 지점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한편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철학자는 이 개념이 상징계와
상상계 사이의 지점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즉, 욕망이 향하지만 상징계(사회)가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지점, 바로 그곳에 실재계가 위치한다고 해석했다.
이 실재계란 사실 텅 빈 죽음과 같은 같다. 인간은 텅 빈 해골을 역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도치시켜 미화한다. 그래서 종국적으로 인간은 죽음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
폴 세잔, Still Life with Skull,
1895
여기에서 삶의 충동이란, 죽음 충동을 늦추고 다양하게 변주함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의지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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