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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울 단계 프로이트와 라깡은 우리 자신이 우리 스스로를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성적인 사유를 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상상계에 가깝기 때문이다. 상상계는 이미지에 살고 이미지에 죽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상상계는 항상 부서지기 쉬운, 즉 바뀌기 쉬운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상상계가 약하다는 현실 자체가 상징계다. 철학적인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개념을 완전하게 이해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라캉은 이 상상계 등의 근본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도둑맞은 편지의 비유 등 많은 예시를 덧붙였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가장 논란이 되는 비유가 바로 '거울단계'의 개념이다. 대략 생후 6∼18개월 정도의 아이는 처음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외부 대상과 구별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카오스처럼 하나로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는 자신의 이미지를 알아보게 되고 자신의 이미지에 매료되어 그것을 붙잡으려 하고 떠날 줄을 모른다. 자신의 이미지를 대면하면서 아이는 외부 공간 속에 가시화되는 자신의 형상을 감각적으로 확인하기 때문에 존재감을 느끼며 커다란 환희와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아이는 완벽한 모습으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형상에 도취되는데 이는 나르시시즘의 최초 순간이기도 하다. 아이는 환호하지만 사실은 아이가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거울단계는 실제 몸의 감각과 그것에 대해 투영하는 이미지의 괴리가 은폐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즉, 거울 속 이미지를 마주하고 있는 아이는 실재로는 아직 신체적으로 미숙하여 자기 몸을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지만, 거울 속 이미지는 완벽함과 통일된 상이기 때문이다. '거울단계'의 가장 근본적인 맥락은 아직 상상계적 작용에만 자신을 맡기던 아이가 처음으로 상징계가 제공해주는 이미지에 자신을 맞추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신체 이미지를 매개로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또한 외적 세계를 구성한다. 그렇지만 상징계의 이미지는 유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거울에 나타나는 이미지나 환영을 동일시해서 성취감을 느끼는 주체는 상상계인 거울 앞에서 늘 좌절할 수 밖에 없다. 르네 마그리트, 잘못된 거울(The False Mirror), 1935 외부로 가시화된 이미지는 내 것이기도 하지만 실은 주체의 나르시시즘이 투사된 타자적 대상이기도 하다. 벨라스케스, 거울보는 비너스,1647-51 그래서 결국 거울 단계는 매우 행복한 단계이기도 하면서, 허구적 구축이 이루어지는 단계이고 타자를 통해 자아가 구성되는 단계이기 때문에 자기 소외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라캉은 “주체가 스스로를 발견하고 제일 먼저 느끼는 곳은 타자 속에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타자는 실제 타자를 의미할 수도 있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주체가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은 주체의 타자다. 인간은 타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때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조적으로 인간의 욕망은 순수하게 나의 내면적 의지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타자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점에서 소외의 표현이기도 하다. 자아가 타자라는 말은 이런 소외된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다. 2. 벨라스케스의 거울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57 화가는 제 얼굴이 들어간 이런 그림을 어떻게 그렸을까? 그땐 카메라가 없었던 시대였으니 틀림없이 거울을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대개 거울을 보고 그린 화가의 자화상에는 왼쪽 오른쪽이 바뀌어서 붓은 왼손, 팔레트는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상하게 거꾸로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고 상상을 해서 이런 작품을 그렸을까? 자신의 모습만을 상상으로 그린 것일까? 아니면, 그림 전체를 완전히 상상으로 그린 것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벨라스케스는 진짜로 왼손잡이 화가 였을까? 그런데, 어둑한 그림 뒷벽 복판에 거울이 또 하나 걸려 있다. 벨라스케스 ‘시녀들’의 한 부분 거울 속에 두 사람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왕후 마리아 안나이다. 국왕부처는 방안 어디에도 없고 어두운 거울 위에만 희미하게 비치는 마치 거울속 유령처럼 그러져 있다. 그들은 벨라스케스가 이 그림을 그릴 때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국왕부처는 지금 그림 바깥에 앉아서 자세를 취하고 있고, 화가가 이들을 바라보면서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중이라는 해석이 있다. 국왕과 왕후가 이렇게 초상화 모델을 서고 있는 동안, 때마침 공주가 시녀들과 어릿광대를 이끌고 이들에게 놀러를 왔고, 화가는 이 장면을 기억해두었다가 그림속에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매우 그럴싸하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관람자들도, 내노라하는 미술사학자들과 철학자들도 이 해석에 옳다구나 맞장구를 치며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좋아했다. 벨라스케스 ‘시녀들’의 한 부분 그런데, 국왕부처가 그려진 거울은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떨어진 거리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면 과도하게 크게 표현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관찰자가 바라본 방 안쪽까지의 거리는 매우 멀다. 벽에 걸린 그림이나 천장의 샹들리에를 이용해 소실선을 그리고, 이들이 만나는 소실점을 찾아보면, 거울이나 국왕부처가 실제보다 과비례로 크게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만한 시선거리, 이만한 크기의 거울에 국왕부처의 모습이 이 작품에 있는 것처럼 비치기는 어렵다는 것이 과학적 공학적 설명이다. 게다가 이 거울 속에는 공주와 시녀들의 뒤통수뿐 아니라 등돌린 캔버스도 조금씩 나와야 하는데, 거울에는 과비례로 부풀려 그려진 국왕부처 밖엔 없으니 참 희한한 일인 것이다. 3. 세잔의 거울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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