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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8.08.12 22:33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75)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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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낮달의 시간 “이 엄동설한에 얼음물을 벌컥대는 걸 보니 가슴속에 천불이라도 났나보다.” 주방에서 불쑥 나온 경철이 한 마디 했다. “아이고, 이제 점쟁이들 밥줄 끊겨서 아사하게 생겼네. 맞아, 나 지금 열불이 나서 미치겠으니까 건들지 마.” “모르긴 해도 가슴 태우는 불은 그런 맹물로는 어림도 없다. 자, 앉아라!” 경철의 말이 떨어지기기 무섭게 직원이 소주 한 병과 잔 두 개를 가져왔다. “참 나, 사장과 직원 손발이 아주 척척 맞는구먼. 개시를 이런 식으로 하나? 고맙지만 오늘은 컨디션이 제로여서 노 땡큐!” 영미는 테이블에 놓인 술과 잔을 손수 거둬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경철의 시선이 영미의 동선(動線)을 따라 움직이다 일순 허공으로 올라갔다. “허허 우리 영미가 술을 다 사양하다니, 이건 마치 고양이가 생선을 거부하는 꼴이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럼 냉수 한 잔 더하고 맨 정신으로 얘기해봐. 뭐가 문제인지.” 영미는 아차 했다. 경철이 뭔가 눈치를 챈 것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급히 다른 구실이 필요했다. 이미 뱃속의 아기가 누구의 씨인지 판명이 된 이상 사실대로 털어놓는 건 위험한 선택이 될 게 뻔했다. “별 것 아니야. 이 동장군의 계절에 난데없이 날파리가 나타났거든.” “날파리?” “그래, 오빠도 아마 알고 있을 걸, 다나카라고. 여기도 몇 번 왔을 건데.” 경철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아, 그 양아치! 현지처를 미끼로 아가씨들 후린다는 놈!” 경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편에서 유리컵을 정리하고 있던 직원이 무슨 일인가 싶어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맞아, 그놈. 내가 전화를 안 받았거든. 그랬더니 글쎄 오늘밤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문자 질이야. 그러니 열 안 받겠어?” 영미는 과장된 몸짓을 지켜보는 경철의 표정에 노여움이 가득했다. “그 놈이 지금 너를 노린단 말이야? 아니, 그 새끼가 집을 어떻게 안다니? 그럼 혹시?” 다시 뜨끔했다. 전에 다나카를 집에 들인 걸 경철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미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미연이 있잖아, 우리 앞방. 지퍼에만 손을 대도 신음을 쏟아내는 우림각비음의 여왕 말이야. 걔가 가르쳐 준 모양이야.” 애먼 미연을 끌어들인 게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큼 경철의 표정이 심각했던 것이다. 어디서 이런 부정직한 순발력이 이리도 자연스레 나오는 것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꾸며대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아, 그러니까 미연이가 지 집에 그 자식을 재우면서 알려줬다는 거구나. 앞방에 영미가 살고 있다고. 미연이 그년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고 지랄이라니. 가게에 오면 내가 한 번 따끔하게 혼을 내야겠다.” 일이 이상하게 꼬인다 싶어 영미도 바짝 긴장했다. 오늘이라도 미연이가 손님을 모시고 가게에 나타난다면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이어서 내심 초조해졌다. 아무래도 이따 미연에게 알리바이용 문자라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철의 미간에 세로줄 두 개가 또렷했다. 화가 났다는 증표였다. 영미는 좀 불안하면서도 경철의 그런 표정이 싫지 않았다. 그건 오빠가 그만큼 자신을 아낀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오라버니 성질 죽이셔요. 미연이 이미 나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었거든요. 그러니 오라버니는 참아요.” 영미는 부러 콧소리로 상냥하게 굴었다. 한편으로는 이래서 거짓말이 어렵구나 했다. 하나의 거짓말을 뒷받침하려면 열 개의 다른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게 실감되었다. “아무튼 그놈 내 아지트에 발만 들여놓으면 그걸로 인생 종치는 거야.” “어머, 오라버니가 우리 집을 아지트라고 해주니 왜 이리 가슴이 뛰지. 신기하게도 근심 걱정이 싹 사라지네.” 영미의 수다에 경철의 입술이 살며시 늘어졌다. 영미는 다시 한 번 경철의 관심을 끌어보고 싶었다. “근데 그 친구 어디서나 찬밥 신세일 텐데, 그렇게 문전박대로 떠돌다 우리 집 문 앞에서 버티면 어쩌지? 그럴 수도 있잖아.” “그럼 나한테 바로 연락해. 내가 달려가서 패대기를 쳐버릴 거니까.” “어머나, 폭력은 안 돼. 옥바라지는 우리 영남이 하나로도 벅차. 오라버니까지 교도소로 보낼 순 없어. 그니까 나한테 맡겨요. 내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영미는 경철이 자기를 지켜줄 든든한 사내로 보여 여간 만족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문득 오늘 밤은 경철의 품에 안겨 잠들고 싶어졌다. 모처럼 쉬는 날, 사랑하는 사람과 도란거리며 마음과 몸을 나누는 것만큼 좋은 휴식이 어디 있을까. 영미는 직원도 들을 수 있게 집에 가겠다고 말하고 손을 흔들었다. 밖으로 따라 나온 경철이 저녁이라도 먹고 가지 그러냐고 말하자 영미는 제 배를 손으로 툭툭 치며 아까 두둑하게 먹었다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경철에게 몸을 기대 듯 기울여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따 가게 좀 일찍 끝내면 안 돼?” 경철이 고개를 틀어 영미를 바라보았다. “왜, 무슨 일 있어? 아, 다나카 그 놈 때문에?” “아니야, 그 자식 안 와. 와도 내가 걷어차서 처리한다니까.” “근데, 왜?” “어휴, 남자가 왜 이리 눈치가 없을까. 조신한 숙녀가 용기 내서 보자고 하면 무조건 오케이 하고 달려들 준비를 해야지.” 아직도 무슨 말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경철이 되록거리는 눈으로 영미의 얼굴을 더듬었다. 답답해진 영미가 기어이 소리를 꽥 질렀다. “진짜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아니면 알고도 시치미를 떼는 거야. 그래 내가 얼굴에 철판 깔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게. 오늘 밤 영미가 씨 없는 수박 좀 먹고 싶다고, 이 바보야!” 그제야 경철이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치며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진작 얘기하지. 뭘 그리 뜸 들여서 빙빙 돌리고 그래. 알았어. 이따 봐서 손님만 끊어지면 바로 갈 게. 근데 수박은 몇 조각이나 드실 생각인가?” “뭘 몇 조각이야. 한 통 다지. 각오해, 아주 껍질까지 먹어버릴 거야.” 경철이 아이고 무서워, 하며 몸을 움츠렸다. 영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식품 판매대에서 경철이 좋아하는 순대와 조리된 장어를, 그리고 생활용품 코너에서는 남성전용 바디워시와 샤워볼을 골라 바구니에 담았다. 계산대에 올려놓고 보니 순전히 경철을 위한 것들이어서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걸어오는 길에 자꾸 커다란 ‘다라이’가 떠올랐다. 어릴 적, 부엌 한구석을 차지한 그 커다란 플라스틱 대야는 우리 집에서 뭔가를 담을 수 있는 가장 큰 그릇이었다. 아버지는 가끔 무쇠 솥에 물을 끓여 그 다라이에 옮겨 담고 찬물을 섞은 다음 오누이를 불러 물놀이를 하게 했다. 따뜻한 다라이 안에서 동생과 물장구를 치며 놀다보면 손과 발에는 어느새 쪼글쪼글한 주름이 생기기 일쑤였다. 둘이서 노는 동안 아버지는 곁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는 했는데, 어느 날은 아버지가 허공에 시선을 걸어두고 그랬다. 이렇게 물에서 노니까 좋지? 옛날에 엄마랑 아빠도 여기서 자주 놀았다. 너희들 태어나기 전에 말이야. 엄마가 이 다라이에 물을 받아놓고 자주 목욕을 시켜줬거든. 물론 아빠도 엄마를 씻겨 주었지. 아버지는 그 얘기를 입버릇처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애먼 담배를 볼이 홀쭉해지도록 빨았다가 길게 뿜어내고는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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