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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8.09.30 22:44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82)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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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기억

 

 

6. 낮달의 시간

 

“차라리 내가 터트리는 게 낫지 않을까?”

“회장님 면전에서 자폭을 하겠다는 거냐?”

영미가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너무 위험해. 하려면 저번 접대 때 했어야지. 하긴 그 자리에서 네 처지를 밝혔다면 그 어른 성격에 무슨 난리가 났을지 모르지. 어쨌거나 지금은 때가 아니야. 너는 물론이고 여러 사람이 다칠 수 있으니까. 아가씨들 검증에 대한 책임이 있는 장 마담도 그렇고, 자초지종을 따지고 들면 나도 무사하지 못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장 마담이 복도 끝에서 부속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늘 그렇듯 턱을 당겨서 정면을 응시하는 장 마담 특유의 걸음걸이가 오늘따라 더 당당해 보였다.

“전에 유사한 전례가 있었을 것 같은데.”

정아가 허리를 곧게 펴며 물었다.

“물론이지. 내 기억에 두 번 정도. 근데 이 경우와는 사정이 달랐어. 그 사람들은 회장님이 사채까지 막아주며 받아준 케이스가 아니었거든. 그러니 처리도 간단했지. 그냥 내보내는 걸로 끝냈으니까.”

장 마담의 출현에 실내가 잠잠해졌다. 영미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모든 시선이 장 마담의 입으로 쏠렸다.

“오늘따라 다들 왜 이렇게 부지런을 떤 거지? 손님이 차고 넘칠 때는 나무늘보 뺨치게 게으름을 피우더니. 벌써 눈치를 챘겠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일감이 넉넉하지가 않다. 도쿄와 오사카 쪽 폭설로 캔슬된 비행편이 많아. 예보를 보니 아마 내일까지도 영향이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그제 어제 연장으로 일한 사람은 오늘 자발적으로 쉬도록 한다.”

일순 실내가 술렁거렸다. 얼른 봐도, 오늘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할 아가씨가 절반 이상이었다. 소란이 잦아들지 않자 장 마담이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좋아, 나는 오늘 하늘이 두 쪽 나도 일을 해야겠습니다, 하는 사람 손들어 봐.”

장 마담이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금 뿌려진 미꾸라지 대야처럼 들썩이던 실내가 이내 잠잠해졌다.

장 마담이 퇴장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아가씨들이 우르르 몰려 커튼 뒤로 갔다. 정아도 뒤따라가 옷고름을 풀었다. 옷을 갈아입으며 아가씨들은 너나없이 투덜거렸다. 통보를 좀 빨리 해주었으면 목욕비도 미용실비도 안 들었을 것 아니냐고. 먼지 나게 지갑 털어서 이리 광내고 나왔는데 그냥 돌아가라는 것은 너무한 처사라며 입을 삐죽거렸다.

“이거 아무래도 보릿고개가 시작되는 것 같은데. 진짜 격세지감이 있다. 아가씨가 달려서 쩔쩔매던 시절이 엊그제인데 말이지.”

영미가 환복을 도와주며 소곤거렸다.

“기상 때문에 그런다잖아. 다시 비행기 뜨면 좋아지겠지.”

“아니라니까. 비행기 몇 편 결항에 천하의 우림각이 휘청거리다니 이게 말이 돼? 하늘길이 막히는 상황은 예전에도 심심찮게 있었어. 그런데도 그때는 밀려드는 손님 때문에 연회장에서 음식 먹을 시간이 없었거든. 그냥 대충 양주나 몇 잔 마시고 다음 팀에 밀려 나가고는 했다니까.”

정아는 영미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묵묵히 벗은 한복을 갰다. 영미가 다시 푸념처럼 중얼거렸다.

“큰일이야. 아무래도 예전 같은 호시절은 다시 올 것 같지 않아. 아 씨, 우리 아버지 요양원에 계실 동안이라도 손님이 넘쳐야 하는데. 우리 정아도 빚을 털고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제야 정아가 고개를 들어 힘없이 웃었다.

“정 안되면 우리 일본으로 튀어서 한몫 잡자. 근데 문제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 우린 벌써 시들어가는 꽃이니까.”

한숨을 내쉰 영미가 손바닥으로 턱받침을 만들었다.

대기실을 빠져나온 정아는 연회장과 연결된 복도를 꺾어 돌아 왼편 계단을 따라 걸었다. 일을 배정 받지 못한 아가씨는 이 계단을 통해 후문으로 빠져 나가게 되어 있었다. 문까지 배웅하겠다며 영미가 한사코 뒤를 따랐다. 문이 저만큼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정아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어서 들어가. 언제 스탠바이 떨어질지 모르잖아.”

“걱정 마, 내 몫의 일감은 언제나 있으니까. 그나저나 오늘 뭐할 거야?”

“모처럼 시간이 났으니 은지랑 놀 거야. 엄마 얼굴 잊어먹지 않게.”

“좋은 생각! 근사하다. 나도 항상 은지가 마음에 걸렸는데.”

“그리고 저녁에 잠깐 미친개 좀 만나보려고 해. 어떻게든 매듭을 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잘 생각했어. 지금 제일 바람직한 해결책은 미친개가 짖지 못하게 입을 막는 거지. 만나서 사정해봐. 정 씨알이 안 먹히면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 자줘라. 개에 물리는 셈치고.”

그때 위에서 뭔가가 파닥거렸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건물 기둥에 걸린 새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가까이 다가가 목을 늘였다. 선반에 나란히 앉아있던 두 마리의 새가 다시 또 날아오르며 파닥거렸다.

“어머, 귀여워! 이게 무슨 새지?”

정아가 감탄조로 말했다.

“글쎄, 마담언니가 얘기해줬는데 까먹었다. 까먹었으니 까마귀인가?”

정아가 영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질렀다.

“바보야, 저렇게 작고 하얀 까마귀가 어딨어?”

“고급 조크지. 아, 그래, 생각났어. 백문조라고 했던 것 같아. 회장님이 손수 먹이를 주는 새인데, 이번에 회장님 선거에 나가잖아. 그래서 일부러 밖으로 내쳤다고 들었어.”

“선거에? 근데 출마와 새가 무슨 상관이야?”

“당락을 족집게처럼 맞추는 점쟁이가 그랬다는 거야. 집에 가둬둔 생명이 있으면 다 집밖으로 내보내라고. 그래야 당선이 된다고.”

“웃겨! 그렇다고 이 추운 계절에 밖으로 내쫓나?

“아유, 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게 탈이야. 분명한 것은 우리 회장님께서 이번 선거에 출마한다. 그리고 당선을 위해 새장은 건물 밖에 둔다. 그거야. 뭐가 어려워.”

“나는 회장님이 뜬금없이 출마한다는 것도 그렇고 점쟁이 한마디에 새장을 밖으로 내치는 것도 이상한 편법 같다.”

“냅둬. 우리 회장님이 인생 자체가 편법 아니냐. 원래 우림각을 열 때도 명분은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해서 건전한 여행문화를 정착시킨다는 거였어. 그렇게 민간교류를 활발하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일 양국의 우호증진에 이바지 하게 된다. 뭐 그런 취지였다고.”

“오, 시작은 그럴 듯 했구나.”

그때 스탠바이를 알리는 벨소리가 울렸다. 정아는 영미의 등을 떠밀었다. 영미가 손을 흔들며 복도로 사라졌다. 새들이 다시 파닥거렸다. 정아는 다시 새장을 쳐다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파닥거리는 이유가 분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건 수컷이 암컷의 등에 올라가려고 시도할 때마다 나는 소리였던 것이다.

한일 양국의 우호증진이라. 정아는 문을 빠져나오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문장을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교과서나 신문에서가 아니라 생생한 육성을 통해서 말이다. 정아는 문득 한 사내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렸다.

공항로에 철쭉이 만발했으니 5월이었을 것이다. 그가 말년 휴가를 나왔다가 귀대하는 날, 정아는 공항 3층 출구의 의자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오빤 앞으로 희망, 그러니까 꿈이 뭐야?”

“꿈? 음... 내 꿈은 해병전우회에 가입하는 거.”

“피, 그게 뭐야. 해병전우회 가입이 꿈인 사람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어.”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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