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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8.10.15 00:13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84)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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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84) - 바람의 기억


6. 낮달의 시간 


정아의 단도직입적인 제안에 당황한 것일까. 미친개는 두어 차례 마른기침을 한 다음 특유의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현명한 결정을 했구먼. 그러잖아도 연락이 없어서 지금 강 회장과 약속을 잡으려던 참인데. 아조 간발의 차이로 화를 면한 거요.”

정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화를 면하다니,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늘 정나미가 떨어지는 말만 골라서 하는 것일까. 근래 은지를 살펴준 선의가 고마워 마음이 좀 누그러졌는데, 말을 듣는 순간 다시금 분노가 치밀었다. 정아는 숨을 고른 뒤 애써 담담한 어조로 약속 시간과 장소를 문자로 찍어달라고 말했다. 그가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허허, 거참 민망하게 구시네. 그건 접대하는 사람이 알아서 하는 거지.... 참고로 뭐 꼭 특급 호텔이 아니어도 괜찮소. 난 실용적인 사람이니까.”

다시 정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미친개가 노리는 속셈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렇게 노골적으로 호텔까지 들먹이다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시야에 들어온 모든 풍경들이 안개 속 풍경처럼 흐릿해졌다. 정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 까짓 거 내 기꺼이 접대해 드리지. 이것으로 너와의 악연을 끝낼 수만 있다면 말이야. 정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도 이쪽에서 호텔까지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정아는 우림각 전용 호텔 외에 따로 아는 숙박업소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네요. 호텔은 그쪽에서 잡으세요.”

특유의 쇳소리가 섞인 웃음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런 적극적인 자세 좋아. 알겠어. 그 의견은 내 접수하지.”

그는 이따 예약 결과를 문자로 알려주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마침 기다리던 버스가 왔다. 정아는 뒤편 창가 자리에 앉아 도로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공항로로 접어들어 유도화 가로수 길을 지나자 돌담 너머로 주렁주렁 달린 노란색 귤이 보였다. 이따금 뜨고 내리는 비행기가 차창에 그림처럼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폭설로 하늘길이 끊겼다는 일본과 달리 이 섬의 공항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한 모습이었다. 

정아는 이륙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가뿐히 날아올라 사뿐히 내려 고향으로 가고 싶었다. 엄마는 이 추운 겨울을 어찌 나고 계실까. 작년에 화장실을 다녀오다 넘어져 병원 신세를 진 이후 건강이 예전만 못했다.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신지. 경제적 여건이 좋아지면 제일 먼저 엄마를 모셔올 계획이었는데. 아, 이 망할 놈의 돈.    

버스가 속도를 줄이더니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부자마트가 가까워졌다는 증거였다. 마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4차선 도로가 제법 한적했는데, 개점 이후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시내로 들어가려는 차와 쇼핑객의 차가 뒤섞여 늘 정체가 심했다. 버스 운전사가 몇 차례 공격적으로 운전을 시도하다 제풀에 꺾였다. 차들의 간격이 점점 더 촘촘해지다가 그마저도 멈춰버렸다.  

정아는 고개를 돌려 부자마트를 바라보았다. 입구에서 가까운 계산대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정아는 지난달까지만 해도 저 계산대에서 일을 했다. 학원을 그만 두고 처음으로 가진 일터였다. 계산대에 눈에 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오른편 구석으로 시선이 갔다. 거긴 캐셔들을 총괄하는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사무실 안에는 12개의 계산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폐쇄회로가 설치되어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팀장이 있다. 

팀장은 40대 초반으로 이른바 돌아온 싱글이었다. 선명한 2:8 가르마에 포마드를 듬뿍 발라 마주칠 때마다 시선이 절로 머리로 가는 남자. 정아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찾아갔을 때 그가 책상 위에 두 발을 올린 자세로 물었다. 일을 하고 싶다고? 그럼 한 바퀴 돌아보세요. 정아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쭈뼛거렸다. 그가 불뚝성을 냈다. 아니, 우리말 몰라요? 우리 업장에서 일 할 수 있는 몸인지 아닌지 보겠다는 거예요. 정아는 그제야 천천히 시계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눈길이 스캔하듯 정아의 전신을 훑었다. 좋아요. 내일 이력서 지참해서 오세요. 

다음 날 정아의 이력서를 훑어본 그가 반색을 하며 정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기다리던 직원이구만. 원래는 지하 식품부로 가야 하는데 내 특별히 캐셔 쪽으로 갈 수 있게 힘을 써보리다. 이쪽에 일본 관광객이 묵는 숙소가 많아서 일본어에 능통한 캐셔가 필요했는데, 잘 되었네.     

그렇게 시작된 캐셔 일은 그러나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일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툭하면 불러내는 잦은 회식이 문제였다. 일과를 끝내고 집에서 좀 쉬려고하면 팀장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정아처럼 임시직으로 일하는 캐셔들을 따로 불러내 자주 회식을 시켜주었는데, 말이 회식이지 본인의 술자리나 다름이 없었다. 1차는 주로 삼겹살에 소주를 먹었고, 그 계산은 본인이 했다. 하지만 술자리가 그걸로 끝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2차로 간 노래주점의 술값은 모두 동석한 캐셔들이 부담해야했던 것이다. 한 푼이 아쉬운 정아의 입장에서는 나눠서 내는 술값도 부담이 되었다. 게다가 그는 고기를 먹을 때도 술을 마실 때도 정아를 제 옆자리에 두고 수작을 부렸다. 처음에는 허벅지를 만졌고 나중에는 가슴까지 노렸다. 자리를 박찬 정아가 노래라도 부를라치면 뒤에서 껴안아 하체를 바짝 밀착시켰다. 그러면서 자주 귀엣말로 속삭였다. 자기 내가 좋아하는 거 알지? 조금만 참고 일해. 그럼 내가 자길 제일 먼저 정직으로 돌릴 거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그러던 어느 날 불려 나가서 보니 다른 직원은 없고 오직 단둘뿐이었다. 뭔가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이 노래주점까지 동석했다. 그날따라 그는 자꾸 술을 권했고, 그동안 지겹도록 들은 자신의 생애를 주절대기 시작했다. 그건 만취가 되면 나타나는 주사 중 하나였으므로 정아는 어서 자리를 떠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의 손이 기습적으로 정아의 젖가슴을 파고 들었다. 

정아는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좀 더 흠씬 때려주거나 신고를 할 걸 그랬다는 자책을 했다. 겨우 뺨 한 대 후려치고 쫓기듯 나오다니. 

문에서 가까운 계산대에 앉아있는 미화의 옆모습이 보였다. 부지런히 바코드를 찍고 있다. 정아가 캐셔로 오기 전까지 팀장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는 미화. 그녀가 어느 날 술에 취해 정아를 노려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니도 팀장이랑 잤어? 

마트를 지나 네거리에 이르자 거짓말처럼 길이 뚫렸다. 우회전한 버스가 속력을 높였다. 저만치 정류장이 보였고 옆으로 눈에 익은 벽돌 건물이 보였다. 정아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낮추고 고개를 늘였다. 강의가 있는 날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했던 학원. 일본어 강좌는 어떻게 되었을까. 원어민 강사인 미츠코가 담당한 고급반을 제하고 일본어 강좌는 모두 폐강되었는데, 다시 열린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하긴 원장으로부터 다시 강의를 맡아달라는 연락이 온다 해도 소용이 없는 상황이기는 하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느낌이랄까. 정아는 학원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떨궜다. 

버스에서 내린 정아는 뭘 사갈까 하다가 가까운 롯데리아로 들어갔다. 줄을 서서 기다려 은지가 좋아하는 불고기버거와 치킨 반 마리를 주문했다. 평일 오후인데도 손님이 많아서 20분 정도 기다려야 하는데 괜찮겠느냐고 캡을 쓴 아가씨가 물었다. 정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번호표를 받아들고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피자봉지를 든 미친개의 모습을 상상했다. 특유의 팔자걸음으로 피자 가게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피자가 나오는 동안 그도 이처럼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정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개의 이중적인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자가 밀렸을 때 그토록 가혹하게 굴던 그가, 그리고 유부녀에 아기까지 있다는 사실을 강 회장에게 폭로하겠다고 괴롭히며 집요하게 잠자리를 요구하는 그가, 은지에게는 왜 그런 지극 정성을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그가 나를? 그런 생각이 들자 정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우림각의 다찌임을 뻔히 알면서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다 말고 정아는 백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예상대로 미친개의 번호가 떴다. 문자를 확인한 정아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숙소도 걸어서 갈 수 있는 바닷가 호텔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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