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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9.01.14 19:32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95)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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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95) - 바람의 기억


7. 꽃비의 계절

정아는 기남의 언급을 통해 자신이 처지를 다시금 실감했다. 몸이 현장을 떠나와도 '다찌'라는 삶의 굴레는 언제든 자신에게 부담과 아픔을 줄 것이라는 슬픈 예감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차가 미끄럼을 타듯 휴게소로 들어갔다. 정아가 은지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영미가 한마디 했다. 

"피가 무섭지요? 생김새도 그렇지만 어떻게 저렇게 뛰는 모습까지도 판박이 일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딸내미를 보니 영락없는 정아의 어릴 때 얼굴이에요."

"할머니가 보시면 얼마나 흐뭇하실까?"

"그러니 새벽밥 드시고 나와서 목을 빼고 계시는 거지요."

영미의 감탄에 기남이 장단을 맞추었다. 

기남이 마실 것을 사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영미가 뒤통수에 대고 커피를 부탁했다. 마침 차로 돌아오던 정아와 은지가 기남을 만나 휴게소로 돌아갔다. 영미는 은지의 양팔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에서 내린 영미는 기남이 건넨 컵을 받아들고 호호불어 한 모금 넘긴 다음 은지가 내민 봉지에서 호두과자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아까 세 사람이 나란히 걸어오는데 뭔가 궁합이 맞는 풍경을 보는 것 같아 제 마음이 다 흐뭇했어요."

"궁합이 맞는 풍경이라, 그거 굉장히 유익한 말인 것 같은 데요?"

기남이 정아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정작 정아는 두 사람의 대화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머쓱해진 기남이 노인네가 대합실에서 목을 빼고 계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키면서 어서 출발하자고 재촉했다. 정아가 시트에 음료수라도 쏟으면 낭패니 얼른 먹고 가자고 버텼다. 영미도 그게 좋겠다고 정아 편을 들었다. 기남도 더는 보채지 않고 차 트렁크에서 먼지털이개를 꺼냈다.     

"아까 말씀 중에 친구들이 다들 정아를 주시했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기남 씨가 제일 좋아했을 것 같아요"

앞 유리를 털고 있는 기남을 향해 영미가 말했다. 기남이 다시 정아 눈치를 살폈다. 

"정아가 나한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아서 내가 손을 좀 썼지요. 애들 시켜서 소문도 내고 말이에요. 하하하."

"어휴, 나쁜 놈! 나는 그것도 모르고 얼마나 억울하고 분했는지 알아? 너랑 손잡고 바윗골에서 데이트하는 걸 봤다는 말도 들리고 심지어 내가 너희 집에서 빨래를 했다는 소문까지 들었다."

"어머, 못됐다! 머리를 써도 어떻게 그런 식으로 썼담."

영미가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흘겼다.  

"하하하,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중학교에 들어가서 벌을 제대로 받았습니다. 꼬마 손님 교육상 여기서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요."

정아는 기남이가 한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기남은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빈둥거리더니 슬슬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2학년 초와 말에 정학 처분을 받더니 3학년에 올라가자마자 기어이 일을 냈던 것이다. 모텔에서 여학생 3명과 3대3 혼숙을 하다가 적발이 되었던 것. 당시 개교 이래 가장 많은 6명이 한꺼번에 학교에서 쫓겨났는데 다른 학생들은 자퇴 형식이었지만 전력이 많은 기남은 퇴학 처리가 되는 바람에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시로 나가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기남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건 어느 해 가을이었다. 읍내에 생활용품 대리점이 새로 문을 열었는데, 놀랍게도 거기 대표가 바로 기남이었던 것이다. 기남은 서울로 올라가 가내수공업 형태의 공장을 전전하다가 어느 유통업체에서 자리를 잡아 돈을 모았다고 알려졌는데 사실 그의 사업자금은 엉뚱한 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찍 홀로 되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시골의 집과 토지를 외아들인 기남에게 남겨주셨던 것. 

어쨌거나 고향을 지키던 친구들은 자수성가해서 자가용을 몰고 돌아온 기남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들은 대개가 대학생이거나 재수생이어서 제 앞가림을 못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기남은 친구들이 오면 만사를 제쳐놓고 술을 사고 밥을 샀기 때문에 그의 주위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정아는 아버지 장례식에 보낸 조화를 통해서 기남을 기억해 냈었다. 그전까지는 그의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고 지냈던 것이다.  

"근데 내가 너 좋아했다는 게 그렇게 닭살이 돋을 만큼 싫었냐?"

유리 청소를 마친 기남 이 이번에는 마신 컵들을 걷어서 제 컵에 포개며 물었다.

"아니, 그냥 그때는 사실이 아닌 말이 나돌고 있으니 기분이 나빴을 뿐이야. 그나저나 우리 친구 중에 네가 제일 결혼을 빨리 했다고 들었는데."

기남이 잠시 뜸을 들였다. 정아가 고개를 돌려 기남을 쳐다보았다. 

 "했지, 근데 실패했어. 하도 징징거리며 물려달라고 해서."

차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뭔가 위로의 말을 건네야할 것 같은데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정아는 문상 온 친구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남이 보낸 조화를 보며 친구들이 그랬었다. 기남이가 요즘 이혼소송 때문에 머리가 아플 거라고. 그때 걸음마를 뗀 아들이 있다고 했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의식한 듯 기남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우울한 얘기는 그만하고. 참, 그때가 언제였더라, 4학년 아니면 5학년, 정확하지는 않은데, 네 가방에다 내가 선물을 넣었는데."

정아가 바로 반응했다. 

"혹시 1회용 삼푸 두 개 말이야?"

"맞아! 그거 2반 인호네 집에 놀러 갔다가 그 집 누나들 것 슬쩍해서 너한테 준 거야."

기남이 운전석에 한 다리를 걸치고 타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훔친 거였어? 그걸 선물이라고 준 거야? 내가 못 살아!"

정아가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영미가 은지를 차에 밀어 넣으며 끼어들었다. 

"야, 이거 두 사람이 추억의 영화를 마구 찍는구나. 부럽다, 부러워."

"그러고 보면 내가 좀 인기가 있었나봐. 선물을 참 많이 받았거든."

정아가 안전벨트를 매며 혀를 날름거렸다.  

차는 휴게소를 빠져나와 다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기남이 백미러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네 아버님 가시던 날이 생각난다."  

정아는 불현듯 장례식 광경을 떠올렸다. 면사무소 앞마당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왔었다. 국회의원이 왔고 군수가 왔고 스님들이 왔고 목사님이 왔고 신부님이 왔다. 머리칼이 사라진 아버지의 얼굴도 떠오른다. 수의를 입은 아버지의 모습은 언뜻 어느 흑인의 주검처럼 보였다. 

그해 겨울에는 유독 산불이 많이 났다. 특히 강원도의 피해가 심각했다. 

아버지는 그날 자식처럼 키우던 소 한 마리를 이끌고 집을 나섰다. 딸내미 등록금 납입 마감일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소는 집을 나서는 내내 슬픈 목소리로 음매, 음매, 하고 울었다. 소는 슬플 때 목으로 우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운다는 것을 정아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정아와 눈이 마주친 소는 눈을 끔뻑이며 줄줄 눈물을 흘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건대, 소가 그렇게 눈물을 흘린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새끼 때부터 자식처럼 보살폈던 주인의 비극적 운명을 예감해서가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아버지는 우는 소를 앞세우고 십 리를 걸어 우시장으로 갔다. 소와 아버지의 이별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정아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정이 많은 아버지의 성품으로 보아 소보다 돌아서는 아버지가 더 속울음을 삼켰을 것이라 짐작한다. 

아버지는 소에게서 푼 풍경과 고삐를 마치 유품처럼 봉지에 담아들고 가까운 주막으로 들어가 막걸리 사발을 거푸 들이켰다. 금세 취기가 올랐다. 해가 서녘으로 가파르게 기울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비틀거리며 버스에 올랐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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