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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9.02.10 23:07

오을식의 장편연재소설 (제98회)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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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연재소설 (제98회) - 바람의 기억


7. 꽃비의 계절

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아버지가 뒷짐을 지고 오갔던 마당에는 이제 잡풀이 무성했다. 문득, 뒤에서 뎅뎅, 종소리가 울렸다. 정아는 안방 벽에 걸려 있을 괘종시계를 떠올렸다. 시간이 벌써 이리 되었나? 어머니가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정아는 대문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스탠바이! 하며 장 마담이 나타날 것 같았다. 

정아는 가방을 안방으로 옮겨두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 사이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집 구경을 하고 있던 영미가 장독대 옆 수동식 펌프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거 진짜 물 나오는 거야?”

“아마 나올 걸?”

정아가 대꾸했다. 마침 어머니가 바가지를 들고 장독대로 왔다. 바가지에는 물이 절반쯤 들어있었다. 어머니는 펌프에다 바가지를 기울여 물을 부었다.     

“할머니, 물은 왜 넣어요?”

은지가 할머니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중물이 들어가야 물이 나오지. 이 물이 들어가서 땅 속에 있는 물을 불러내는 거야. 신기하지?”

정아가 대신 설명해주었다. 어머니가 재빨리 펌프의 손잡이를 위에서 아래로 몇 차례 힘주어 내리누르자 곧 주둥이에서 물이 쏟아졌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 물을 그대로 흘려보내고 나서야 바가지에 물을 받아 영미에게 건넸다. 게걸스럽게 몇 모금 넘긴 영미가 캬아, 하고 감탄했다. 이거 맥주보다 훨씬 맛있는데! 영미의 너스레에 정아가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눈을 흘겼다. 이번에는 영미가 펌프 손잡이를 잡았다. 영미의 역동적인 펌프질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읍내에서 기술자를 불러다 이 펌프를 설치했다. 집에 펌프가 생기자 제일 좋아한 것은 아무래도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펌프에서 물이 쏟아지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의기양양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더 이상 식수를 길러 마을 앞 골지천까지 물지게를 지고 갈 이유가 없어졌던 것이다. 

펌프질은 커다란 다라에 물이 가득 찰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아는 소변이 보고 싶다는 영미를 데리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화장실은 헛간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재래식이니까 조심해야 된다. 빠지면 구더기들과 수영해야 돼.”

정아의 주의에 영미가 큰소리로 깔깔거렸다. 

“빠지면 네가 건져줘야 하니까 가지 말고 기다려줘. 근데 이게 뭔 말이냐?”

영미가 화장실 문에 써진 글자를 가리켰다.      

“쉬운 글자잖아 읽어봐.”

영미가 매직으로 써진 네 글자를 또박또박 소리 내서 읽었다.   

“多. 不. 有. 時. 다불유시? 이게 무슨 뜻이지?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의미인가? 근데 화장실에 왜 이런 사자성어를 써놨지?”

“해석하지 말고 그냥 읽으면 돼. 유식하신 우리 아버지 솜씨야.”

영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니? 영어를 한자로 표현한 거잖아. 다불유시, 즉 WC.”

멍한 얼굴로 정아를 쳐다보던 영미가 그제야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툭 쳤다.   

“와, 아버지 진짜 재밌는 분이시구나.”

“엉뚱하셨지. 나도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어.” 

영미가 문을 열자 정아는 다시 한 번 발판 잘 밟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걱정 마라. 우리 집도 비슷해. 여름 되면 구더지가 똥 위에서 고물고물 뛰면서 운동회를 열지. 달리기도 하고 수영도 하고. 겨울엔 또 어떻고, 고들고들해진 똥 위로 생쥐들이 간식을 즐기러 나와서 멀뚱거리며 쳐다보기도 하잖아. 민망하게시리.”

정아는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돌아섰다. 영미는 문을 닫고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 집 변소는 외양간에 달려 있었어. 그래서 화장실에 가면 소가 눈을 끔벅거리고 쳐다봐. 외양간은 헛간도 겸하고 있어서 구석에 쟁기며 지게, 써레도 있고 벽에는 각종 농기구가 걸려있었지. 근데 난 일단 옷을 내리고 쪼그리고 앉으면 절대로 고개를 들지 않았어. 아니 못했지. 고개를 들면 아버지가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대병들이 들보에 대롱대론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야. 병 속에는 독사가 하얀 배를 둘둘 말고 나를 보려보고 있었는데, 독한 소주를 하도 많이 마셔서 그런지 혀도 날름거리지 못했어. 하지만 언제라도 병을 탈출할 자세였지. 아버지는 그렇게 담아놓은 사주를 허리가 아플 때마다 내려다가 한두 잔씩 드셨는데, 효과가 아주 좋았어. 

영미는 오줌을 누는 내내 종알거렸다. 정아가 얘기 그만하고 어서 나오라고 면박을 주었지만 개의치 않고 주절거렸다. 

정아도 화장실에서 그런 대병을 본적이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다 마신 소주병을 깨끗이 씻더니 목에 돌멩이를 매달고 긴 줄을 연결했다. 그러고는 뒷산에서 따온 솔잎으로 병 주둥이를 빈틈없이 막았다. 그걸 지금 영미의 오줌이 떨어진 똥통에다 던져 넣었는데, 아버지는 그 걸 사계절이 지난 다음에야 줄을 당겨 끄집어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똥물이 가득 들어있어야 마땅한 병에 맑은 물이 가득 들어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것을 촘촘한 삼베로 걸러서 깨끗한 병에 옮겨 담아 서늘한 광에다 보관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그 똥물은 대단히 훌륭한 약이라고 했다. 몸에 부기가 있거나 열이 날 때 한두 잔 마시면 바로 효과가 있다는 것. 정아도 몇 번 마셔야 할 위기가 있었으나 발버둥을 쳐서 겨우 피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역정을 내며 말했다. 이런 겁쟁이 같으니, 이 물은 죽었던 사람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약이야. 정아는 언젠가 그 물을 마시는 아버지께 맛이 어떤지 물었다. 아버지는 태연하게 그러셨다. 신맛과 단맛, 쓴맛, 짠맛, 매운맛이 동시에 느껴진다고.    

“참, 내가 잊어먹을 뻔했다. 똥통에 구더기 없애려면 어떻게 하는 줄 알아?”

옷을 추스르며 밖으로 나온 영미가 정아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정아는 고개를 저었다. 

“석유 같은 기름이 직방이야. 그게 구더기들 숨통을 막아버리니까. 근데 그건 돈이 들어가는 데다 혹시 담배 피우고 일 보다가 큰일 날 수가 있지. 나중에 거름으로 쓰기도 그렇고 말이야. 그러니까 자연친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해. 뭐냐 하면, 그냥 산에 가서 솔가지를 꺾어다가 넣어.”

“솔가지가 구더기를 없앤단 말이야?” 

 “그렇대도. 소나무에서 나온 무지갯빛 진이 기름 역할을 하거든. 뭐, 구더기들 고물고물 운동회하는 거 계속 보고 싶으면 할 필요 없고.”

“그런 운동회는 싫어.”정아가 진저리를 쳤다.  

둘은 부엌으로 갔다. 어머니는 벌써 저녁 준비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아궁이 두 개에 불이 들어가 있었다. 은지는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종알거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 많이 친해진 것 같았다. 정아와 영미는 아궁이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았다.   

“어머니, 어디서 이런 맛난 냄새가 나지요?”

영미가 코를 킁킁거리며 불을 쑤석거렸다.   

“맛난 거 없는데. 그냥 곤드레 밥하고 있어.”

어머니가 대답했다. 은지가 재빨리 소쿠리에 담긴 나물 하나를 집어와 영미에게 내밀었다. 

 “곤드레는 고려엉겅퀴! 이걸로 밥을 지으면 곤드레 밥!”

은지가 신이 나서 설명했다. 할머니가 가르쳐준 모양이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곤드레만드레 나물이구나.”

“아이, 참 곤드레만드레가 아니고 그냥 곤드레!” 

은지가 손사래를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아가 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사람은 밥상을 두고 둘러앉았다.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 앞에 앉으니 까닭 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마침내 삼대가 모여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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