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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예술칼럼
2019.11.03 23:38
수많은 예술언어의 놀이
조회 수 1505 추천 수 0 댓글 0
최지혜의 예술 칼럼 (229) 수많은 예술언어의 놀이모더니즘의 양식에도 다양한 것들이 있다. 하지만, 이 다양성은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모더니즘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새로움의 추구에 있었고,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언어가 다양해졌을 뿐이었다. 사실 양식의 다양성은 모더니즘의 예술적 목표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모더니즘의 강령들은 저마다 오직 내 것만이 진정으로 새롭다는 식의 배타성을 띄고 있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달랐다. 다양함을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추구했다. 심지어 전통으로의 복귀를 거부했던 모더니즘과는 반대로 전통 또한 포괄적으로 수용했다. 리히터의 작품세계는 온갖 예술 언어가 말 그대로 짬뽕처럼 섞여 있다. 포토 리얼리즘과 같은 사진적 재현이 있는가 하면, 구상성이 배제된 회화적 추상도 있다. 추상의 경우에도 추상표현주의나 앙포르멜을 닮은 게 있는가 하면, 구성주의나 미니멀리즘, 색면추상과 모노크롬을 연상시키는 것들도 있다. Gerhard Richter, September (Ed. 139), 2009 심지어, 개념미술에 가까운 게 있는가 하면 달리나 에른스트처럼 초현실주의적 공간감을 주는 것들도 있다. 게다가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를 연상시키는 낭만주의적 풍경도 존재한다. 이렇게 끝없이 새로운 언어를 가지고 나타남으로써 그는 늘 예술계를 당혹시키고 있다. 사실 한 화가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주 희귀한 경우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피카소의 청색시대, 적색시대, 큐비즘이 그러하다. 그런데, 리히터는 다르다. 그는 이 모든 예술 언어를 같은 시기에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가령 사진적 재현에서 회화적 추상으로 섞어서 사용한다. 그를 카멜레온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Gerhard Richter, Various Motifs,1978/1984/1988 7. 끝없이 언어를 바꾸다 아마도 그의 개인사가 그의 다양한 양식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Gerhard Richter (1950) 동독에서 배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미학적 교리와 서독에서 배운 미국과 유럽의 미술을 통해 그는 고정된 양식에 안착하기를 거부하고 끝없이 언어를 바꾸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히틀러와 스탈린, 두 개의 전체주의를 체험하면서 이데올로기를 극도로 싫어했다. 정치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예술 이데올로기도 그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예술에 하나의 양식을 강요하는 것은 그에게 히틀러, 스탈린이 하는 짓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스타일이 폭력이라고까지 말했다. 서독에 망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첫 작품으로 동료 콘라드 피셔와 함께 퍼포먼스를 연출한 적이 있다. 가구 상점의 공간에 탁자와 소파 같은 부르주아 생활의 도구가 마치 예술작품처럼 받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두 명의 예술가는 역시 받침대로 드높여진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정치적 내용의 방송을 시청했다. 그날은 마침 콘라드 아데나워 총리가 사임하던 날이었다. 이날을 맞아 서독의 경제 기적에 만족해하는 부르주아 시민의 모습을 냉소적 뉘앙스로 연출한 것이다. 이 퍼포먼스에 그는 ‘팝과 더불어 살기-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실연’(1963)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가구를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작품인 양 기리는 것은 일상을 예술로 끌어올리는 팝아트의 제스처를 차용한 것이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행위는 플럭서스 퍼포먼스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데,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제목은 동독 예술이 공식적 강령이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패러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 퍼포먼스 이후부터 리히터는 자신의 방법을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불렀다. 특히 1960년대에 리히터는 주로 포토 리얼리즘 작업에 매달렸다. Gerhard Richter, Aunt Marianne (87), 1965 그가 사진에 매료된 이유 역시 독특한 데가 있다. 회화와 달리 사진은 양식화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진에는 양식도 없고, 구성도 없고, 판단도 없다. Gerhard Richter, Seascape (377), 1975 카메라는 대상을 이해하지 않고, 그것들을 그냥 본다. 반면 손으로 그린 그림들은 일종의 시각적 종합이기에 현실을 왜곡시키고 특정한 종류의 양식화로 흘러간다. 그 결과 현실은 이미 알려진 것으로 상투화되고 정형화된다는 것이다. Gerhard Richter, Mouth, 1963 1966년에 제작된 ‘8명의 학생 간호사’는 고등학교 졸업앨범에서 뽑은 여덟 장의 흑백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진의 주인공들은 같은 해 7월 시카고에서 일어난 대량 살인사건의 희생자라고 한다. 언뜻 보면 사진 같으나 실은 물감으로그린 그림이다. Gerhard Richter, Eight Student Nurses, 1966 1962년 이래 그는 ‘아틀라스’라는 이름 아래 여기저기서 오려낸 사진첩을 마련해 두고 거기서 골라낸 사진을 원작회화의 밑그림으로사용해 왔다. Gerhard Richter, Album photos, 1962–1966 (Atlas Sheet: 1) 이 점에서 리히터의 작업은 앤디 워홀의 팝아트를 닮았다. 하지만 워홀과 달리 리히터는 자신의 작품이 정말 사진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팝아트보다 포토 리얼리즘에 가깝다. 하지만 포토 리얼리즘이 사진보다 더 높은 해상도를 구현하려 한다면, 리히터는 이들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는 오히려 대상의 윤곽을 흐리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말하자면 그의 윤곽 흐리기는 대상을 손으로 잡지 못하게 함으로써 작품에 최종적인 의미를 주지 않으려는 장치라고도 할 수 있다. 이로써 대상의 의미는 고정되지 않은 채 열리게 된다. 1986년의 어느 인터뷰에서 리히터는 이렇게 말했다. “유일하게 역설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언제나 적절한, 구성된 모티브로 완결된(closed) 사진을 얻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시작하는데, 조금씩, 조금씩 그 의도를 파괴하여 마침내 작품이 완성됐을 때에는 개방성(openness)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리히터는 포토 리얼리즘 작업과 나란히 추상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포토 리얼리즘의 구상과 모더니즘의 추상이라는 두 개의 극단이 동시에 공존하게 된 것이다. 리히터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 현실은 어느 하나의 그림 안에서 단 한번에 남김없이 포착되지 않는다. 남는 것은 결코 손으로 잡지 못한 채 현실에 접근하려는 끝없는 시도뿐이었다. Gerhard Richter 그의 현실은 수많은 예술언어들의 놀이를 풀어놓으면서도 늘 우리에게 그 모습을 진실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렇게 그는 1980년대부터 비로소 포스트모던의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시작했고 포스트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 되고 있다.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메일 : choijihye107@gmail.com 블로그 : blog.daum.net/sam107 페이스북 : Art Consultant Jihy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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