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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의 음악일기
2020.05.19 19:47

눈부신 5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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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의 음악일기 세 번째 이야기
눈부신 5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


코로나에 빼앗긴 2020년의 봄, 그 끝자락에서 눈부신 5월을 바라본다.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계절은 어김없이 제자리와 제시간을 지키니 벌써 봄이 깊은 5월이다.

이상화 시인은 물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 하고….
눈이 녹아 흐르는 자리에 생명이 피어오르는 5월의 봄은 그때에도 왔을 것이다. 하지만 빼앗긴 땅에서 희망조차 잃은 봄이었기에 그는 여전히 시리게 추운 겨울에 머물렀으리라.
코로나에 빼앗긴 봄날이 아쉬워 한자락 선율에 봄꽃을 피워보려 한다.


찬란한 5월

독일의 가을은 청명한 하늘과 공기에 마음이 들뜨는 한국의 날씨와 달리 해 조차 보기 힘들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쓴 전혜린 작가는 독일의 가을을 "하늘은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었고 무겁고 칙칙했다. (중략) 나는 울고 싶게 막막했고 무엇보다도 춥고 어두운 날씨에 마음이 눌려버렸다" 라고 표현했다. 

길고 무거운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맞이하는 봄, 기분 좋은 햇살이 내리쬐고 흙내음과 꽃향기가 적당히 섞여 부드럽게 코끝을 자극하는 계절. 독일에서는 바로 '5월의 봄'이다. 그래서인지 독일에는 봄을 노래한 곡들이 참 많다. 괴테와 릴케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기적같이 아름다운 5월의 봄에 경의로움을 표했고, 많은 작곡가들은 그 시에 노래를 붙였다.


봄바람이 분다

작곡가 슈베르트는 가곡의 왕이라 불린다. 그가 작곡한 가곡은 무려 633곡인데 그 중 제목에 봄이 들어간 노래만 꼽아도 금방 열 개를 채울 수 있다. <봄에게> An den Frühling D283, D587,  <봄 시냇가에서> Am Bach im Frühling D361, <봄의 송가> Frühlingslied D398, <봄의 정령> Gott im Frühlinge D448, <봄노래> Frühlingsgesang D740, <봄에> Im Frühling D882, <봄날의 꿈> Frühlingstraum D911,11, <봄의 갈망> Frühlingssehnsucht D957,3. 

프란츠 슈베르트 <봄의 신앙> Frühlingsglaube D686
그의 삶은 춥고 고달팠다. 작은 키에 못생긴 외모, 내성적인 성격 탓에 변변한 연애조차 한번 해보지 못했고, 돈이 없어 늘 상하지 않게 소금에 잔뜩 절여놓은 떨이 음식을 사다 먹어 얼굴은 퉁퉁 부어 있기 일쑤였다. 

봄의신앙 악보.jpg
프란츠 슈베르트 <봄의 신앙> 자필 악보

그런 그에게 '봄'은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죽은 듯 잠잠하던 대지에 푸르름을 돋게 하고, 생명을 잃고 말라붙은 듯 우두커니 박혀있는 나무가 다시 잎을 만들어 내는 그 신비. 그는 어쩌면 그의 인생에 기적과도 같은 '봄날의 신앙'을 꿈꾸어 왔는지도 모르겠다.

"온화한 바람이 잠에서 깨어 밤낮으로 속삭이고, 살랑대며 온 천지를 누빈다 / 오 신선한 내음, 새로운 소리! 자, 초라한 내 마음, 근심을 걷어내리 / 이제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변할 터이니 / 세상은 나날이 더 아름다워지고 / 어떤 것이 변할지 누구도 알 수 없네 / 꽃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저 멀고 깊은 골짜기에도 피어나네 / 자, 초라한 영혼이여, 아픔 따위 잊어버리자! / 이제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변할 터이니"

부드럽게 불어와 모든 것을 변화시킬 봄바람. 슈베르트가 평생토록 꿈꿔왔던 인생의 봄날을 우리는 지금 너무도 무심히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봄꽃이 피다

로베르트 슈만의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 중
<아름다운 5월에> Im wunderschönen Monat Mai
슈만은 슈베르트와 달리 열렬한 사랑에 빠져 살아간 인물이다. 부인 클라라와의 만남은 그의 예술세계와 인생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슴 저미는 사랑의 시작. 꽃이 피듯 마음속에서 자라난 사랑이 어떤 색 꽃을 피울지 아직 모른다. 어느 틈에 다시 꽃잎을 떨어뜨리고 이별을 맞이하게 될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운명이 스치면 사랑이 싹튼다.

"꽃봉오리들이 모두 피어났을 때 /나의 마음속에도 / 사랑의 꽃이 피어났네 / 아름다운 5월에 / 새들이 모두 노래할 때 / 나도 그 사람에게 고백했네 / 초초한 마음과 소원을"

브람스, 클라라, 슈만.jpg
브람스, 클라라, 슈만 (좌측부터)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에 슈만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슈만의 대표적 연가곡 '시인의 사랑' 첫 곡이다. 슈만은 사랑의 모든 계절을 이 연가곡에 담아두어 듣는 것만으로 사랑의 환희와 절망, 아픔과 위로를 느끼게 한다. 그 첫 곡 <아름다운 5월에>는 시작하는 사랑의 설렘과 긴장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조심스럽게 고백을 시작한다. 어렵사리 말을 꺼낸 그에게 그녀의 눈빛이 닿자 심장이 터질 듯 뛰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래서인지 잠잠히 고백을 이어가던 노래 선율은 뭔가 끝을 맺지 않은 듯 마무리된다. 다 전하지 못한 말을 피아노 선율에 실어 노래는 잦아들고, 그 사랑 이야기의 다음 장면이 궁금해 악보를 한 장 넘긴다.



봄밤을 거닐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5월의 밤> Die Mainacht Op.43,2
"은빛 달빛이 숲속을 비추고, 그 졸린 빛이 잔디밭에 흩날리면 / 꾀꼬리 노래하고 나는 슬프게 덤불과 덤불사이를 방황하네 / 나뭇잎 가린 한 쌍의 비둘기는 황홀함을 지저귀고 / 난 고개 돌려 어두운 그늘을 찾아 헤메이네 / 외로운 눈물만 흘러내리는데 / 새벽빛 같은 미소로 내 영혼을 밝히는 그대를 이 땅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 / 빰 위로 뜨거운 눈물 떨어뜨리며 떨고있네"
브람스는 스승 슈만의 연인이었던 클라라를 사랑했다. 그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묻고 그는 평생을 홀로 살았다. 그에게 5월은 유독 가슴 시린 달이다. 클라라에게 사랑을 고백한 자신의 생일이 있는 달이고, 또 훗날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달이다. 달빛이 고즈넉한 봄밤의 정취가 그에게는 슬픔이었고, 그가 걸은 봄밤은 안타까움과 외로움의 길이었다. 그렇게 아픈 봄을 보내고 또다시 봄이 찾아온다. 
봄은 그렇게 세월을 거스르지 않고 또다시 우리를 찾아왔다.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세상이 평화로워도, 나의 마음이 어지러워도, 나의 마음이 행복에 겨워있어도.
그 걸음을 주저하지 않고 잠잠히 다가와 어느샌가 봄바람은 불어오고, 그 바람은 꽃을 피운다. 

"삶이란 지평선은 끝이 보이는듯해도 / 가까이 가면 갈수록 끝이 없이 이어지고 / 저 바람에 실려 가듯 또 계절이 흘러가고 눈사람이 녹은 자리 코스모스 피어있네 / 모든 순간에 이유가 있었으니 / 세월아 가려무나 아름답게 / 다가오라 지나온 시간처럼"
김태원의 곡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하여> 가사처럼 모든 순간에 이유가 있었으니 세상이 나를 흔들지라도 초라해지지도 아파하지도 않고 잠잠히 봄을 살아가자. 이렇게 떠나보낸 봄은 또다시 지나간 시간처럼 아름답게 다가올 테니 그저 하루를 살아가고, 순간을 살아낸다.
그렇게 우리는 봄의 끝자락에 서있다.

코로나에 빼앗긴 우리의 봄에도
찬란한 5월의 선율이 가득 피어나길 희망하며

음악 칼럼니스트 여명진 크리스티나
mchristinay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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