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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납자(雲水衲子)의 길
맥주축제장인 테레지엔 광장에서 도보 5분 거리에 “불이선원(不二禪院)” 이라는 조그만 선방이 있다.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의 저자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파란 눈의 수행자 현각스님의 현 주소다. 맥주축제기간 중에는 하루 최고 100만 여명이 마실 거리, 먹을 거리, 볼 거리, 탈 거리 그리고 웃을 거리를 즐기고자 몰려드는 맥주축제장이 테레지엔 광장이다. 축제기간애도 테레지엔 광장의 모퉁이에 있는 불이선원에서는 맥주축제장으로부터 메아리 치는 소음과 지나가는 옥토버페스트 마니아들의 술주정에도 아랑곳 없이 수행자들이 모여 염불과 참선에 전념했다. 그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수행자로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가 운수납자(雲水衲子)로서 구름처럼 물처럼 흘러가다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 독일의 뮌헨이다.
미국에서는 나를 위해서만 살았지요. 나의 학벌, 경력, 나의 명예, 나의 가족을 위해서, 나의 경제력을 위해서 나, 나, 나, 나를 위한 삶이었지요. 한국에서 수행생활을 하면서 교육과 정진을 통해 나 자신을 떠나 타인에게 베푸는 삶을 배웠다고 할 수 있지요. 나 개인과 가족의 테두리를 떠나서, 배고픈 자에게는 밥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주고, 고통 받는 자에게는 시간을 내어서 상담을 해주고 대화를 나누었어요. 어떤 때는 하루 24시간 동안을, 그리고 주말도 없이 지냈어요. 독일에서는 저 자신의 수행을 위해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겼어요. 제가 한국에서는 수행자로서 큰 실수를 했는데, 그것은 제가 한국에서 너무 유명해진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시선이 있었고 너무 바쁜 생활이 계속되었어요. 불교의 행사가 있을 때는 물론, 대학교에서의 특강, 문화강연회, 결혼식 주례, 예술가들의 전시회 참석 등 수행자의 길에 전념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했어요. 물론 저에게 잘 해주시는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저는 다시 수행자로서의 생활에 충실하고 싶었어요. 지금 이곳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불이(不二), 둘이 아닌 선원이란 뜻입니다. 인간들이 고통을 받는 이유는 머릿속에서 습관적으로 항상 둘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나와 너, 아군과 적군, 천한 것과 귀한 것,동쪽과 서쪽 등으로 구별합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만들어 현실생활에 드러낼 때 항상 갈등이 일어납니다. 모든 종교들이 갈등하는 이유는 이렇게 둘을 만드는 습관 때문입니다. 불이사상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아주 중요한 재산입니다. 이 곳 독일도 한국처럼 2개로 분단 되었던 나라입니다. 독일이 통일해서 불이(不二)의 나라가 된 것처럼 한국도 통일을 해서 두 개가 아닌 하나의 나라가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은 부시 정권 아래에 있었고, 기독교가 주축을 이루는 미국사회의 종교관은 닫혀있는 것이었어요. 다른 세력은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막힌 생각이 주류를 이루었지요. 그러나 유럽은 종교문화와 정신문화가 열려있는 사회입니다. 독일인의 경우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기독교인은 전체 기독교인의 10%도 안되지만 남녀평등, 비폭력주의, 사형금지, 친환경주의, 반전운동 등을 중시하여 가장 예수님의 뜻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타 종교에 대해서도 매우 관대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저도 똑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만과 일본인은 유럽에서도 불교에 대해서 여전히 관심이 높지만, 한국인은 기존의 종교와 관계없이 교회로 많이 갑니다.
2009년 9월입니다. 수행자들은 40명 정도 입니다. 한국인이 20여명 그리고 독일인을 포함한 외국인이 20여명입니다. 지금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법회가 있는데, 많아지는 수행자들을 위해 앞으로 좀더 넓은 곳으로 선원을 옮기려고 합니다. 훗날에는 농가를 빌려서 선원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는 미국과 한국생각을 많이 합니다. 한국이 그리울 때는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면서 한국소식을 수시로 접하고 있습니다, 항상 한국이 잘 되도록 빌고 있어요. 특히 이산가족문제와 북한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일이 있을 때는 방문합니다.
예, 이번에 4개월 만에 갑니다. 여성평화단체의 초청으로 가는데, 세계 종교지도자들이 세계 정상들에게 경제난 속에서,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대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는 행사에 참가하게 됩니다. 유로저널: 뮌헨에서의 포교활동 그리고 수행생활의 어려움이라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독일어를 잘하지 못해서 불편합니다. 법회는 한국어와 영어를 사용합니다만 생활상에는 독일어를 해야 합니다. 사실 1988년 학생시절에 독일의 쉬바르츠발트에서 3개월간 독일어를 공부했었는데 한국에서 18년 동안 한국어를 사용하다가 독일어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뮌헨의 물가가 너무 비싸서 당황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본 파리, 뉴욕, 보스톤, 서울의 대도시 중에서 뮌헨이 제일 비쌉니다. 이곳에서는 보시도 그렇게 많지 않으며 제사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춥고 배고픈 생활이 되기도 하지요. 생활비 때문에 식당이나 호텔에서 접시닦이로 일하려고 합니다.
한국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어서 가끔 행사참가를 위해 방문하지만, 뮌헨은 지금 제가 수행자로서 정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서산 대사께서 “수행자들은 춥고 배고파야 도심이 생긴다” 라고 말씀하셨듯이 저에게 가난은 무섭지 않습니다. 외롭고 쓸쓸해져도 수행자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제가 머리 깎은 뜻을 이룰 수 있는데 가까운 생활이 지금의 뮌헨생활이며 만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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