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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9 23:34
PD, 실험 가운을 입다.
조회 수 854 추천 수 0 댓글 0
난자 파문이 결국 '국제적 난동'의 서막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계 석학들이 인정한 연구가 '가짜'라고 생각하는 것도 놀랍거니와, 방송 전문가가 과학세계를 헤집고 다닌 과욕과 무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랴. 'PD수첩'의 담당자는 DNA가 나선형이라는 정도는 알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생명의 신비를 뿜어내는지 취재만 하면 다 밝힐 수 있다고 자신했는가? 그랬다면 '취재'결과를 세계 최고의 저널 '사이언스'에 투고할 것을. 분수를 모르는 '경계 넘기'의 오만함, 늘 우려해 마지않았던 질투와 폭력의 심성이 결국 대한민국을 국제적 불신의 나라로 만들고 순진하다 할밖에 없는 과학자를 무고(無辜)의 공간으로 몰아갔다. 결과는 비참하다. 과학적 자산에 대한 국가 관리능력의 파산과 지적 권위를 난도질당한 대학의 '사회적 사망'이 그것이다. 미래세대가 누릴 지적재산권이자 한국과학의 자존심인 황우석 연구팀의 성과를 굳이 액수로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국가적 자산이 이렇게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나라, 조치는커녕 정작 쾌거의 주인공이 온갖 혐의에 재기 여부를 우려해야 할 상황에서 "이 정도로 그치는 게 좋겠다"는 느긋한 관전평을 내놓는 나라에 이 시대의 과학자들이 어떤 열망을 갖겠는가. 우리의 국가는 지구상의 어느 정부나 하는 그 일상적인 예산 지원 외에 과학자와 과학적 성과를 보호하는 역할이 무엇인 지를 알고는 있는가? 혹시 코드가 비슷한 방송사의 특종기획이어서 막연히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황우석 교수를 비롯해 국민 모두가 겪는 소모적 고통과 마음의 상처는 무엇이든 뒤집어야 속이 차는 이 시대의 '전위적 행위양식'이 낳은 결과처럼 보인다. 더 심각한 것은 대학의 '사회적 사망'이다. 이 사건은 대학에 대한 사회적 신뢰의 기초를 정면으로 부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불길하다. 담당 PD가 의혹을 확신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지적 생산의 경비대인 학계로 과제를 건넸어야 했다. 왜 과학의 문외한인 그가 직접 실험 가운을 입고 나섰는가? 황우석 교수를, 연구팀을, 나아가 대학의 연구기능을 점검하고 직접 결과를 내고 싶었는가? 'PD수첩'의 행위는 탱크를 앞세워 대학을 점령했던 군부정권보다 더 '군부적'이다. 군대는 적어도 연구실 외곽에 진을 쳤지만 'PD수첩'은 연구실 내부까지 과감하게 진입했다. 연구자.실험결과.시료.방법 등을 일일이 점검했으며, 성과가 가짜가 아니냐고 다그치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경계 넘기를 지나 한국의 모든 대학과 대학교수가 방송사의 취재권력에 무릎 꿇기를 다그친 것과 같다. 방송은 진실 규명이라는 사명감에 도취돼 수시로,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방식대로, 대학의 연구결과와 연구행위를 검열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것이다. 흔히 주장하듯 보수신문이 이른바 '영웅 신화'를 만들었다 치면, 진보는 그것을 반드시 뒤집어야 했을까. 한국사회는 경계를 짓밟는 이런 횡포를 개혁과 혁신의 이름으로 봐주는 마구잡이 사회가 되었나? 재검증하라는 시민단체의 요구는 더욱 막막하다. 과학은 오페라 공연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이. 대학의 권위는 사회적 인정으로부터 나온다. 인정하기를 거부할 때 대학은 죽고, 지식과 과학생산은 멈춘다. 밤낮 연구에 정신이 팔린 괴짜들이 공익재를 쏟아내는 것은 대학이 다른 어떤 기관보다 탁월한 자정능력과 여과기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성과가 진품인지를 가름하는 기제는 여러 겹이고 매우 정교하다. 그런데 실험실을 벗어나는 동안 활발하게 분열했을 줄기세포를 들고 여기저기 노크하고 다닌 그 PD의 '연구결과'가 방송을 타는 순간, 대학은 사기극의 주범이 됐고 본업을 반납했다. 그 PD는 스스로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을까, 그리고 방송사는 결국 '대학의 사망'을 선고했음을 인지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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