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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2012.10.02 06:17
독일에 와서 농부가 된 파독광부출신 장광흥 사장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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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와서 농부가 된 파독광부출신 장광흥 사장이 뜬다
매달 마지막 주 일요일 12시경에 베를린 천주교회 앞으로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헨농장 장광흥 사장을 만나봤다. ‘오랜만’ 이라며 반갑게 어깨를 감싸 안는 그의 손은 까칠하다. 농사로 굳은살이 박힌 손과 손톱은 까만 진흙으로 물들어 있다. 오랜 독일 생활 속에서도 아직도 변함없이 간직한 전라도 사투리 역시 순수하다. 그 먼길을 밤새도록 달려온 피로감은 보이질 않고 항상 환하고 친절한 그는 아헨에서 저녁 늦게 떠나 베를린에 도착하면 민박집에서 잠간 쉬고 한국식품점과 한식식당들을 들려서 온다고 했다. 힘들게 농사지어 수확한 야채들을 풀어헤치는 장 씨는 인심 좋기로 이미 소문이 나있다. 트럭 속에 차곡차곡 비닐봉지에 담은 배추, 부추, 쑥갓, 쪽파, 깻잎, 알 타리 무, 조선 무, 풋고추 및 꽈아리 고추, 호박 등을 차에서 꺼내기 시작하는 장 사장은 야채를 사러온 교민들과 그동안의 소식도 교환하며 시골 토박이의 순박함을 쏟아 낸다.
그는“제 배추·무 없으면 유럽 김치 맛 없제” 라며 자부심에 꽉 차 있다. 재독 교민 사회에 한국산 배추·무 등 사시사철 싱싱한 야채를 제공 받을 수 있는 ‘아헨자연농장’이 있다는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비닐봉지에 채울 수 있는 만큼 얼마 던지 많이 담아 가여~” 야채를 사러 온 중년 주부들 이 비닐봉지가 터지도록 꽈아리 고추를 열심히 담고 있는 광경이 벌어진다. 누가 얼마나 더 많이 가져가는지 신경도 안 쓰는 거 같다. 양심껏 퍼가고 돈은 줄만큼 주면 된다고 생각 하는 거 같다. 몹시도 궁금해서 야채 구입하고 지불 하는 모습을 오래 지켜보았다. 돈을 벌기위해서가 아니라 고향 냄새를 풍기는 야채를 오직 교민들을 위해 정성들여 재배하고 수확하면서 힘들었던 과정들을 잊나 보다. 그는 그저 행복해 보인다.
어떻게 독일 땅에 발을 딛었으며 왜 농부가 되었는지? 장 사장 : 1977년 10월 마지막 파독 광부로 독일 땅을 밟았다. 그때 내 나이 27살 때 였다. 원래는 딱 3년만 일해서 광주에 집 한 채 살 돈만 마련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80년 5월에 광주 민중 항쟁이 터져버린 것이지. 독일 정부가 우리들한테는 기간 연장을 해줘서 계속 일하게 되었다. 광산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귀국할까 말까 하다가 아헨에서 농장을 마련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했제. 애초에 돈 벌 생각보다 은퇴 후에 부업처럼 시작했는데, 자꾸 물건을 갖다 달라고 하는 곳이 늘어나서 밭이 조금씩 넓어지다 보니 이렇게 돼 버렸다. 수확량이 많아져 요즘은 3.5t 트럭으로 매일 한 차(車)씩 빼내도 밭에 물건이 남는다. 우리 농장 배추가 없으면 유럽 교포들이 김치 맛을 제대로 못 보제. 한국산 채소만 전문으로 생산하고 있는데 독일서 씨받으면 맛 안나 한국서 종자 모두 들여 오재,
꼭 독일에 정착했어야 하는 이유는? 장 사장 : '80년 5월' 이후 독일 정부는 한국에서 온 광부들이 원할 경우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줬다. 그전의 파독 광부는 모두 3년 계약 만료와 함께 귀환시켰으나, 정책이 바뀐 것이다. 결국 그래서 독일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80년 12월에 잠깐 귀국해 전남 화순 한 고향 사람인 아내와 선을 본 뒤 81년 1월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독일로 들어왔는데 결혼하고서도 3년만 더 일하고 다시 귀국 하려 했는데, 애를 낳고 그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그냥 주저앉게 됐다. 솔직히 그때만 해도 한국보다 여기서 교육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자식들도 모두 훌륭히 잘 키운 걸로 알고 있다. 장 사장 : 큰딸은 아헨 지역의 한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고, 큰아들은 패션을 전공해 의류 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때 지역 프로축구 리그에서도 뛰었던 막내아들은 아헨공대에서 공부하고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 일가를 이루고 아이들 잘 키웠으니 더 바랄게 없다.
교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아헨자연농장 장 사장은 꼭 ‘대통령상 을 받아야 한다.’ 고들 하는데 그동안 공로상은 받았는지 장 사장 : 상 2개 받았다. 꽤 오래 됐다. 약 15년 전 외무부 장관 상 받았고, 또 12년 전 쯤 인가 노동부 장관 상 받았다.
장 광흥 사장의 젊은 청춘은 고향을 떠나 독일 땅속 탄광에서 광부로 , 그리고 땅위에서 넓은 농장의 흙과 함께 농부로 보내왔다. 젊은 시절 농사를 지어본 것도 아니지만 그의 아내 박봉순 씨와 농부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농업에 충실하고 있다. 장 사장은 교민들을 위해 재독 교민 각종 행사에 김치와 야채를 찬조 해왔다, 장 사장은 아헨 한인회장 역임한바 있으며, 현재 재독한인총연합회 임원으로도 봉사를 하고 있다. 유럽에서 한국 교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 인근의 쾰른이나 본뿐만 아니라 자동차로 3~4시간은 족히 걸리는 프랑크푸르트· 밤새워서 달려가는 베를린 등 독일 내 주요 도시와 국경 너머 암스테르담(네덜란드)과 브뤼셀(벨기에)까지 그는 직접 트럭을 몰고 가 한국식당이나 교회·성당 근처에 차를 세워놓고 배추를 판다. 영국,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에도 중간 유통업 자를 통해 그의 밭에서 자란 야채가 팔려간다. “누가 요즘 저런 힘든 농사일을 해서 재독 교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야채를 제공해 줄 수 있을까?” 하면서 야채를 구입하러 나온 교민들은 “저런 분은 꼭 대통령상을 받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유로저널 베를린 안희숙 기자 ( ann200655@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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