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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전체
2013.10.31 08:35
“그리스도를 위한 나그네”인 성 콜롬반 외방 선교회 한국 진출 80주년, 휴 맥마혼 신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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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전인
1933년 10월 29일, 열 명의 콜롬반 신부들이 부산항을 통해 한국 땅을 밟는다. 그 후 한국에
파견된 많은 콜롬반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사목활동을 하면서 일제 시대, 한국 전쟁, 유신 시대, 광주 민주화 운동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같이 겪게 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난과 억압하에서 고통을 겪을 때, 그 분들은 피정지도와
카운슬러로서, 병원 사목/노인 사목/빈민 사목까지, 그리고 장애인 복지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70년대에는 노동사목과 야학에 힘을 쏟기도 했다. 특히 유신 때는 시대적 사명에 맞는 응답으로 “정의평화위원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다. 또한 1953년 카톨릭 평신도 신앙,봉사 단체인 레지오 마리아를 한국에 처음 소개도 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1961년 제주도에 세워진 이시돌 목장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한국과 아일랜드의
문화 교류를 위해 애쓰신 선교사들도 많은데, 외국인 최초로 국문학
박사이며, 우리 고전부터 현대문학에 이르기까지 시,소설을 영어로 번역해
우리 문학을 널리 알린 케빈 오루케 (Kevin O’Rourke)
신부님은 한국 진출 40주년을 즈음해서 최근 책을 내시기도 하셨다.
“My Korea: 40 years without a Horsehair(갓)” “유로저널”은 성 콜롬반 외방 선교회 한국 진출 80주년을 맞이하여, 50년전인 1963년 한국에서 처음 선교 활동을 시작한 아일랜드 휴 맥마혼(Hugh
MacMahon) 신부로부터 성 콜롬반 외방 선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휴 맥마혼 신부님은 1995년까지 한국에서 사목 활동을 하셨고, 그 이후에는
중국, 홍콩에서 활동을 하셨다. 1년 전 고향 아일랜드에 돌아가80여개 되는 선교회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는 Irish Missionary Union 원장직을 맡고 있다.
휴 맥마혼 신부님은 다른 콜롬반 신부님, 브렌단 호반(Brendan
Hoban) 신부님, 브렌단 맥케일(Brendan MacHale) 신부님과 번갈아가면서 아일랜드 카톨릭 한인 공동체를 위해 한국어로 미사를 집전해주시기도 한다. 신부님, 반갑습니다. 성 콜롬반
외방 선교회가 한국 땅에서 선교를 시작한지 올해가 80주년이 됩니다. 올해 한국에서는 어떤 기념 행사들이 있는지요? 10월
29일 명동 성당에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의 주례로 80주년 기념미사가 있습니다.
그 후 몇 달 동안 80주년 기념 전시회 및 음악회, 기념 우표 발행, 선교
세미나, 콜롬반회 80주년 사진/물품전, 한국 전쟁 콜롬반회 순교자 영상전 등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성 콜롬반 외방
선교회는 1916년 아일랜드에서
설립되었습니다. 그 당시 어떤 계기로 설립 되었는지요? 처음에는
중국 선교의 필요성 때문에 선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912년 중국 선교를 하다가 아일랜드로 돌아온 에드워드 갈빈 (Edward Galvin) 신부님과 아일랜드에 있는 메이누스 성 패트릭 신학대학 교수였던 존 블로윅 (John Blowick) 신부님 또한 중국 선교의 필요성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셨지요. 그래서 두 분이 선교회를 창설하셨지요.
콜롬반 성인은
어떤 분입니까? 선교회를
설립한 후, 주보 성인을 콜롬반
성인으로 모셨지요. 콜롬반 성인이
아이리쉬이고, 6세기 유럽 각지를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했었으니, 우리 선교회에 적합한 주보 성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우리 콜롬반
선교회도 콜롬반 성인처럼 다른 문화 속으로 들어가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어려운 이들과 연대하는 “그리스도를 위한 나그네” 역할을 생각했었습니다. 성 콜롬반 외방
선교회는 아일랜드에서 설립되었습니다. 2008년 총본부를 아일랜드에서
홍콩으로 옮겼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선교회가
다른 나라에 교회를 많이 설립했는데, 그들 나라의 젊은
신부들을 많이 길러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198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피지/필리핀에서 성소자들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고령화 되어가는
기존의 유럽, 영미 회원들에서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의 젊은 회원들로 옮겨지고 있는 상황에서 다양성 그리고 상호 문화성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지금 현재 콜롬반
소속 신부님들과 수녀님 등 선교 활동을 하는 나라가 몇 나라나 되는지요? 한국/일본/중국/타이완/필리핀/파키스탄/피지/영국/아일랜드/브라질/페루/칠레/미국/호주/뉴질랜드 15국가에 지부가 있습니다. 400명이 훨씬 넘는 분들이 활동하고 계신데, 그 중에는 평신도 선교사들도 몇 십명 있습니다. 1933년 10월 29일 처음으로 성 콜롬반 신부님 열 분이 한국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는데, 일제 치하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겠지요? 그 분들이 처음 오셨을 때 한국어를 배우셨나요? 당연히 한국어를
배우셨지요. 한국 사람들을 선교하러
왔으니까요. 대구에 있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서 6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우셨습니다. 그 당시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과 의사소통의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 두 분의 신부님이 동경에 일본어를 배우러 갔었지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콜롬반 소속 미국/호주/뉴질랜드 출신의 신부님들을 내쫓았습니다. 일본의 적국이었으니까요. 스파이로 의심해 감옥에 보내기도 했구요. 자택연금 등을 당하기도 했구요 . 아일랜드는
그 당시 중립국이어서 다행히 아일랜드 국적의 콜롬반 신부님들은 한국에 있을 수 있었지요. 한국 전쟁 중에는
일곱 분의 콜롬반 신부님들이 순교하셨는데,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요? 아무 이유없이
공산군이 들어와서 즉결 심판을 통해 사형 당했어요. 탈출에 성공한 생존한 신부님도 한 분 계셨구요. 개인적인 질문으로
들어가서, 신부님께서는 1962년 사제 서품을 받으시고 한국에는 1963년에 오셨지요. 아직까지도 이렇게 유창하게 구사하는 한국어는 어떻게 배우셨나요? 사목활동하는데 언어 때문에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1963년 9월에 왔으니까, 올해가 개인적으로는 50주년 되는 해입니다. 처음 돈암동에서 6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웠어요. 그 후 2년 동안 활동하면서 한국어를 많이 터득했구요. 나중에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도 다녔지요.
그 당시만
해도 미사를 라틴어로 집전하던 때였어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65) 이후 모국어로 미사를 하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복음말씀만 한국어로 읽다가 차차 강론도 한국어로 바꾸게 되었지요. 한국어로 강론 준비할 때 강론을 써서 다른 분한테 교정을 봐달라고 했지요.
나중에는 혼자서 준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63년이면 군정에서 민정으로 바뀌던 때였는데, 박정희 정부와는 마찰이 없었나요? 박정희 정부
초기에는 전혀 없었어요. 개인적으로
1967-69년에 교황대사관에서 근무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카톨릭에 대해 호의적이었어요.
글쎄요, 그 때 어떤 영향이었는지 큰 딸인 박근혜 현 대통령이 카톨릭계 학교를 들어갔었지요.
영세를 받은 것으로 알고는 있는데,… 나중에 장기
독재가 되니까 아무래도 초기에 받았던 인상들이 바뀌었지요. 그 당시 한국에서
받은 인상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전쟁이 끝난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고,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군복이나 군복을 염색한 옷을 많이 입고 다녔던
때였습니다. 5-6개 교구가 있었지요. 전후에 구제품이
나오다가 시간이 흘러 중단되자 냉담자가 생겼는데, 냉담자들을 다시 교회로 데려오는 것에 많은 신경을 썼지요. 1969년에 캐나다 오타와
대학교 (Ottawa University)에서 ‘유교 사회의 영향’이라는 주제로 연구를 하셨는데, 그 계기는 무엇입니까? 우리 서양
사람들이 동양을 너무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불가사의한(inscrutable) 세계라고 오해하고 있었지요. 유교에 대해 먼저 공부를 하면 유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요. 사목활동을 하시는
한편, “경향”
잡지나 “Korea Times”에도 많은 글들을 쓰셨고, 1975년에는 책도 내셨는데, 잠깐 소개를 해주시지요. 1975년에 출간한 책
제목을 “The scrutable Oriental”이라고 붙였어요. ‘불가사의함 (inscrutability)’의 반대말을 쓴 것이지요. 서양에서 처음 온 사람들은 사회나 사람들을 피상적으로 볼 수 밖에 없어요. 실제로 내가 활동하는
사회 안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사고를 잘 이해하려면 그 구조 안으로 들어가서
세밀하게 관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맹자의 인(仁)/의(義)/예(禮)/지(智) 덕목을 잘 이해하면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인들의 인간 관계, 상호 의존의 미덕 등 다양한 현상을 나름대로 쓴 책이지요. 아이리쉬면서
선교사의 신분이 유교 사상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셨다고 책에 쓰셨는데, 어떤 뜻입니까? 아일랜드는
오랜 전통의 문화를 가지고 있고 상대적으로 순수한 편이에요. 그래서 오래된 동양 문명과 비교해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요. 또한 기독교의 입장에서 유교적 이상과 비교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구요. 현재까지도 한국
뿐만 아니라, 공산 국가 중국에도 유교적
전통이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많이 변하긴 했지만.
중국도 마찬가지예요. 중국의 이곳 저곳을 많이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정치적으로는 유교와 거리가 멀지만, 그 사람들의 마음, 습관, 행동을 보면 그 전통이 속에 스며있어요.
처음 본당 사목활동을
언제, 어디서 시작하셨어요?
본당을 어떻게 지으셨나요? 1970년 건대입구에
있는 화양동 본당을 맡았어요. 처음 두 달 동안 본부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았어요. 그 후에는 신자들이 모금을 해줘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었구요. 화양 시장
근처 상가 윗층에 1년 전세를 들어 본당을
운영했었지요. 아래층에는 가게들이 들어차 있고, 심지어는 술집도 있었는데
같은 입구를 사용했지요. 그 후에는
공장 건물을 사서 신자들과 함께 성당으로 개조를 해서 사용했어요. 약 5년간. 그 후 모금한
돈으로 다른 신부님이 본당을 새로 지으셨지요. 콜롬반 외방
선교회가 한국에 세운 본당 숫자는 얼마나 되나요? 처음에 본당 세우는 비용을 어떻게 충당했습니까? 서울의 30군데를 비롯해 131군데입니다. 본부로부터
선교 자금을 조금 받아 본당을 세우기 시작했어요. 본당을 세울만한 곳을 다니면서 땅을 샀지요. 미래에 이런 저런 지역에 본당이 들어서야 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요. 그 다음에는
모금 운동을 했어요. 로마 교황청과
교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았구요. “The scrutable Oriental”를 보면, 1972년 어린이 대공원 개장 에피소드를 예로 들으시면서 그것을
1970년대 ‘한국의 새로운 상징’이라고 쓰셨습니다.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이 섞여 있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습니다. 간단하게 소개해주시지요.
그 당시
한국은 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할 때였는데, 나한테는 한국판 디즈니랜드가 우리 본당 지역 안에 있는 화양동(그 때는 화양리였지요)에 세워진다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그 부지에는
원래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그런데 1972년 11월 골프장과
이야기가 잘 되어 어린이 대공원 공사가 시작될 거라는 발표를 듣게 되었지요. 대통령 부인이 기공식에 참석했지요.
대한민국 어린이들을 대표해서 감사하다는 낭독문을 읽은 초등학생이 우리 본당 신자의 아들이었어요. 겨울이 되니
작업을 거의 진행할 수 없었는데, 3월이 되어 땅이
녹자 본격적인 공사가 진행되었어요. 그런데 5월 5일 어린이날에 개장을 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다른 나라라면 최소 1년은 걸렸을텐데, 두 달 만에,…. 낮에는 물론 밤에도
불도저 소리가 끊이질 않았지요. 4월말에 공사가 끝났어요. 개장식때
대통령과 영부인이 나온 것을 텔레비젼으로 보았지요. 나는 그
다음 날 가보았어요. 그 날은 매우 더웠어요.
5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지요. 호루라기를 불면서 질서를 잡는
인원도 약 500명 가량 되었구요. 너무 더워 잠시라도 잔디에서 쉴라고
하면 호각을 불면서 다른 데로 이동하라고 소리를 질렀지요. 어쨌든 그래도 사람들에게서는 자부심과 흥분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 현대적인 공원은 새로운 시대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다음과
같은 장면이 잊혀지지 않아요. 나이드신 분들이 너무
힘들어 잔디에 잠깐 앉으려고 하거나 어린아이들이 놀라고 하면 호루라기를 부는 분들이 쫓아냈어요. 잔디 보호가
잔디를 즐기려는 사람보다 중요한가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물론 시각적으로 즐기는 것도 소중하겠지만요.
지금까지 265명의 선교사, 또한
20여명의 평신도 선교사까지 한국에서 사목 활동을 하셨는데, 지금은 몇 분 정도
한국에서 활동하고 계신가요? 그 분 들
중에는 100여명이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고향 땅에 묻혔는데, 22분은 한국 땅에 묻혀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고 계신 분들은 평신도 선교사 세 분 포함해서 약 40명 정도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많은 선교사들을 해외로 보내고 있습니다. 콜롬반 선교회에는 한국 선교사가 몇 분이나 되는지요?
1984년부터 한국인 회원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아홉 분의 신부님을
배출했습니다. 10여명의 평신도 선교사와 함께 칠레 등 13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20년 넘게 사목활동을 하셨으니,
나눌 이야기가 끝이 없겠지만 오늘은 시간 관계상 여기에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대담 및 기록: 아일랜드 유로저널
기자/칼럼니스트 서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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