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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2013.02.12 00:54
60년만에 다시 찾은 내 고향 북녁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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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저널 단독보도 재독동포 김영상박사 북한방문기 60년만에 다시 찾은 내 고향 북녁땅 (3) 김영상박사(81)는 개성에서 출생해 당시 6년제인 개성중학교를 다니던 중 6.25를 만났다. 18세의 나이에 미 보병 25사단 예하 35연대 군속으로 종군하면서 가족과 헤어진 것이 오늘에 이른다. 김씨는 서울공대를 졸업한 후1958년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 하노버 공대(석사)와 슈투트가르트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공학박사)했다. 김박사는 MAN회사, Hoechst 화학회사 등 독일 유명 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1994년 정년 퇴직했다. 그는 재독한국과학기술자협회장, 프랑크푸르트 한국문화회관 대표를 역임했고, 현재 거주지인 하터스하임(Hattersheim)의 외국인 후원정책팀 고문직을 맡아보고 있다. 독일인 아내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이 기행문은 일기형식으로 꾸며졌으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취재기자(김운경)가 정리했다. 김영상 박사와 부인 김일제 여사 2012년5월6일(일) 묘향산 도착 평양에서 버스로 3시간 이상을 달려 저녁 무렵 묘향산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산자락에 외롭게 자리잡은 ‘정천여관’을 숙소로 정하고 여장을 풀었다. 독일 여행안내서에 별 1개 짜리 호텔로 소개되어 있는 곳이라 잠자리가 불편할 것 같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북한의 별 1개 여관은 대체로 시설이 열악하고 특히 위생 상태가 정결치 못하다. 정천여관은 수십 년전에 북한의 상류층을 위해 지어졌다. 단조로운 한옥이었지만 깨끗하고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그 동안 관리와 유지가 소홀해 시설이 낙후되었는데 수년 전에 보수를 해서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을 받아들이고 있다. 외관상으로는 일견 멋진 한국식 궁전처럼 보인다. 하지만 룸에 들어와 보면 사정이 다르다. 유리창 잠금장치가 떨어져서 흔들거리며 화장실 티슈는 청소용 휴지처럼 거칠었다. 그래도 변기가 수세식으로 개선된 것은 다행이었다. 더운 물은 아침 7-8시와 저녁 9-10시 사이에만 공급됐다. 침대는 나무 판자처럼 딱딱했다. 아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힘들어 해 궁여지책으로 침대보 하나를 더 얻어다 깔고 나서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침대 머리맡에 독서등이 없는 것 쯤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저녁식사는 맵고 짠 한식. 서양인들을 위해서 토스트 빵도 곁들여 나왔다. 그러나 맨 빵만 달랑 두 조각이 나와 황당했다. 그러나 우리 중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우리는 남은 여정을 위해 어떻든지 빨리 북한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식사를 하고 나서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주변의 산세가 알프스산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푸른 자연과 높은 하늘이 내 머리 위로 끝없이 펼져져 있었다. 묘향산의 깨끗하고 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 마셨다. 고향의 공기는 여전히 상큼하기만 했다. 5월 7일(월) 호텔 시설이 열악하고 불편했지만 그런대로 잠은 잘 잤다. 하루종일 다리품을 팔고 돌아다니다 보니 지치고 고단한 탓에 꿀맛같은 잠을 잔 것이다.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 아닌가 싶다. 아침식사도 저녁식사와 비슷하게 간단한 한식과 토스트빵 두 조각, 그리고 계란 후라이 하나였다. 북한에서는 토스트가 구워 먹는 빵이라는 것은 모르는 것 같았다. 비록 작은 잔이었지만 식후 커피도 나왔다. 더 마시고 싶어서 한잔 더 주문을 하려고 했지만 그만 두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다. 커피에 넣을 분유와 설탕 등은 모두 외제 수입품이었다. 독일인들은 북한여행을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안락하고 호화스러운 휴양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 쯤은 미리 각오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방세계와 단절된 미지의 나라를 체험한다는 모험정신으로 북한여행을 결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미흡하고 부자유스럽고 불편하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항의도 없이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았다. 직접 그들에게 물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좋다"고 했다. 독일인 일행은 30대초 부부 한쌍과 50 대 이상 7, 80대였다. 북한 여행이 처음이고 맵고 짭짤한 한식을 처음 먹어보지만 때로는 나보다도 더 맛있게 먹어 내가 놀날 정도였다. 그들이 점점 여행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니 저으기 안심이 됐다. 묘향산 경치
신계사 경내 묘향산 둘러보기 묘향산은 평양과 달리 5월인데도상당히 추운편이었다. 아침식사 후 호텔에서 멀지 않은 신계사를 찾아갔다. 이 사찰은 서울 조계사와 같은 종파로 약 600년전에 세워졌으며 수년 전에 전체적인 보수를 끝내고 현재 약 20명 가량의 스님이 살고 있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북한의 스님은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어 정부의 지침을 따라야 한다. 절에는 스님 뿐만 아니라 스님의 가족들도 함께 거주한다. 관광안내책자를 비롯해 브로셔, 그림엽서 등 소개 자료는 대략 1-5유로. 많이 팔려고 애쓴다. 국제친선박물관 묘향산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국제친선박물관도 방문했다. 북한이 자랑하는 3층짜리 이 박물관은 북한인들의 순례궁전이라고 할 만큼 신성시하고 있으며 한국 전통의 미를 살려 거창하게 지어졌다. 입구부터 군인들의 경호가 삼엄하다. 개인방문자는 없고 대부분 단체로 왔다. 박물관 안에서는 절대 정숙을 요구했다. 이 곳에 세계 각국에서 온 선물들이 157개 홀에 전시돼 있었다. 김일성 주석이 외국이나 외국인에게서 받은 선물들도 이곳에 있다. 대형 상아, 도자기, 진주공예품, 한문서예 등, 중국에서 받은 선물이 가장 많았다. 아프리카에서 온 특이한 상아와 특수 나무로 제작된 목각품, 중동지역에선 대형 은제 접시와 대검을 보내왔다. 특히 눈에 띤 것은 스탈린이 선물한 증기기관차와 모택동이 기증한 승용차였다.각 전시실마다 한복을 차려입은 안내인이 있었다. 안내인이 우리를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대형 홀로 데리고 갔다. 그 홀에는 김일성과 첫째 부인 김정숙의 동상이 있었는데 그 앞에 예를 갖춰 허리굽혀 인사할 것을 권했다. 우리 앞에는 북한사람들이 두 줄로 서서 엄숙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절을 하고 있었다.
국제친선박물관 박물관을 전부 보려면 2시간 이상 걸린다. 우리는 1시간이 넘도록 이곳 저곳 기웃거리다가 3층에 있는 테라스에 올라갔다. 아름다운 산맥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절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있었다. 따분한 전시관 따라 다니는 것보다 수려한 자연을 감상하니 더 없이 좋았다. 오미자차와 커피를 마시면서 피로를 풀었다. 이곳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김정일이 받은 선물들을 전시한 또다른 궁전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시간관계상 방문하지 않기로 했다. 박물관을 나오는데 정문을 향해 1 개 소대의 군인들이 행진가를 부르며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임무교대였다.
우리 일행은 일단 여관으로 돌아와서 점심식사를 한 다음,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등산이다. 자연 그대로의 거칠고 좁은 산 길을 따라 쉬엄쉬엄 올라갔다. 등산로는 돌이나 나무로 쌓아 만든 계단들이 많았다. 올라갈수록 경사가 높아지고 길은 험해졌다. 난간 손잡이 같은 안전설비가 없어 사고의 위험이 있지만 책임은 등산객 본인에게 있다. 특히 두번 째 정자를 지나 법당에 이르는 코스가 난코스. 거의 수직선인데다 좁은 계단길이어서 보통 이상의 건강과 지팡이가 없으면 올라 갈 수없다. 나는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왔다. 이 법당에는 스님 한 분이 부인과 함께 살고있는데 2주마다 아래 마을에서 생필품을 조달한다고 했다. 나는 맨 몸으로 오르는 것도 힘들어 중도포기를 했는데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이 가파른 계단길을 오른다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바위마다 김일성 찬양시 이 곳 묘향산은 태고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큰 바위마다 김일성을 찬양하는 글을 새겨 넣어 자연을 훼손시켜 놓은 점. 그런데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글자를 빨간색으로 칠한 곳도 있었다. 오후 7시가 지나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측은 땀으로 범벅이 된 우리를 생각해 오늘 만큼은 예외적으로 저녁 7시부터 30분간 온수를 공급한다고 해서 우리는 서둘러 교대로 샤워를 했다. 저녁식사 후 우리는 북한에 들어와 처음으로 한가로운 환담을 나눌 수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나에게 한국전쟁에 대한 질문을 했다. 어느쪽에서 전쟁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남한과 미국이 도발했다고 하고, 한국에서는 북한의 일방적인 침공이라고 하니까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는 보태고 뺄 것도 없이 나의 전쟁체험기를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내 자서전 'C-Ration' 을 읽어보라고 소개했다. 사람들은 모두 큰 관심을 보이면서 내 책을 사보겠다고 했다. 늦은 저녁시간, 아내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다음날 다시 평양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글: 김영상박사, 사진: 부인 김일제 정리: 유로저널 프랑크푸르트 김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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