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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2013.02.25 19:32
60년 만에 다시 찾은 내 고향 북녁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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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저널 단독보도 재독동포 김영상박사 북한방문기 60년만에 다시 찾은 내 고향 북녁땅 (5) 김영상박사(81)는 개성에서 출생해 당시 6년제인 개성중학교를 다니던 중 6.25를 만났다. 18세의 나이에 미 보병 25사단 예하 35연대 군속으로 종군하면서 가족과 헤어진 것이 오늘에 이른다. 김씨는 서울공대를 졸업한 후1958년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 하노버 공대(석사)와 슈투트가르트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공학박사)했다. 김박사는 MAN회사, Hoechst 화학회사 등 독일 유명 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1994년 정년 퇴직했다. 그는 재독한국과학기술자협회장, 프랑크푸르트 한국문화회관 대표를 역임했고, 현재 거주지인 하터스하임(Hattersheim)의 외국인 후원정책팀 고문직을 맡아보고 있다. 독일인 아내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이 기행문은 일기형식으로 꾸며졌으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취재기자(김운경)가 정리했다. 5월9일(수) 관광안내인으로부터 사진촬영과 관련해 유의사항을 들었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동상을 찍을 때 전신을 찍어야하며 반신이나 신체 일부만 촬영하면 안된다." "북한신문이나 잡지를 접거나 찢으면 안된다, 이유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 인사법에 대해서도 주의를 주었다. "북한에서는 서로 인사할때 공손히 상체를 굽혀 예를 갖추며 서양식 악수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은 각종 기념관과 관공서 등 고층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시내 중심가를 보기로 했다. 평양을 다녀간지도 9년, 그 동안 도로와 교통시설이 많이 확충되고 개선됐다. 시내에는 고층건물과 고층아파트가 다수 건설됐고 관광사업이 활발해졌다. 승용차가 부쩍 늘어나 없던 교통신호등도 생겼고 시내 한복판은 교통이 혼잡해 이따금 정체현상도 보였다. 또 자전거 도로를 차도 옆에 별도로 설치했다. 이번에 와서 확인한 일이지만 그 동안 북한에 자전거가 엄청 많아졌다. 20년전의 베이징을 연상케 했다. 우리는 먼저 현대식으로 지어진 원통형 고층아파트들이 빽빽히 들어선 거리로 갔다. 이거리는 이 아파트를 기증한 재일교포 이름을 따서 '안앙로'로 명명됐다. 미려한 디자인의 아파트가 마치 여러 건물 사이에서 하늘로 높이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북한은 외국에 거주하는 부유한 동포들이 이처럼 거액을 희사하는 행위를 놉히 평가하면서 자랑했다. 아마 다른 교포들도 본받으라는 속내를 들어내는 칭찬같아 씁쓸했다. 세대별 임대 면적은 120 평방미터이며 임대료는 월급여의 30% 수준이다. 중심가는 많은 시민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시내는 2003년 때보다 훨씬 활발한 모습이었다. 특히 여성들의 옷차림에 큰 변화가 있었다. 화려한 색감의 의상, 무릎 위로 올라가는 짧아진 치마, 5-8센티 정도의 굽 높은 구두 등 예전에 비해 훨씬 현대화된 모습이었다. 반면에 남자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대부분 공산당원 복장이었다. 평양시내는 휴지나 쓰레기를 볼 수 없을 만큼 거리가 깨끗하다. 이 점은 독일의 여느 도시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강서 세무덤과 덕흥리 벽화무덤 시내를 관광한 후 우리는 버스를 타고 남포 방향으로 갔다. 남포가는 도로는 묘향산 가는 길보다 더 나빴다. 길은 널찍했으나 관리가 안돼 버스는 제 속력을 내지못하고 고작 시속 30-50km 정도로 주행했다. 이렇게 약 1시간반 정도 달린 후 우리는 시골 마을의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버스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농로는 울퉁불퉁하기까지 해 도저히 차가 다닐 수 없을 만큼 상태가 나빴다. 이때 반대편에서 소달구지가 나타났다. 버스와 달구지 모두 최대한 좌우로 피했다. 그러다 달구지가 밭으로 빠져버렸다. 가까스로 좁은 길을 벗어나 목적지 마을 주차장에 도착했다. 두 번씩이나 검문을 받으며 도착한 곳은 한적한 시골, 북한이 이제 이런 시골까지 관광지로 개발했구나 싶어 나는 내심 놀랐다. 구판장같은 작은 가게가 몇 군데 눈에 띠였다. 가게 앞에는 소달구지들이 서 있었다. 독일인들은 자신의 고향에서는 보지못했던 이 희귀한 운송수단을 촬영하려고 앞다퉈 버스에 내렸다. 그리고 카메라를 드리대는 순간 안내인 K가 큰 소리로 외쳤다. "촬영중지, 여긴 군사시설입니다!" 인근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었다. 크기가 다른 세 개의 대형 묘가 보였다. 바로 남포시 강서구 삼묘리에 있다는 7세기 때 지어진 '강서세무덤'이었다. 세 무덤이 정삼각형으로 형태로 배치되어 있으며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세무덤 가운데 남쪽에 있는 것이 가장 큰데 규모가 폭 50m, 높이 8.7m나 된다. 세개의 무덤이 다 한 칸으로 된 외칸무덤이며 벽화는 큰 무덤과 중무덤에 있다. 큰 무덤의 청룡과 현무, 중무덤의 백호와 주작 벽화는 독특하고 우수한 고구려 회화술의 걸작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안내자 설명에 따르면 전쟁때 파괴된 것을 김일성 지시에 의해 복원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어서 인근의 덕흥리 벽화고분으로 갔다. 1976년에 발굴된 이 고분은 408년의 기년명(紀年銘)이 있는 고분이다. 피장자(被葬者)가 유주자사 (幽州刺史)를 지낸 진(鎭)이라는 실존 인물로 알려져 역사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특히 고분의 벽화들이 유명한데 묘주의 초상화와 불교의 칠보공양 행사 외에도 여러 가지 당시의 생활 장면들이 그려져 있어서 이를 통해 5세기 초 고구려의 문화와 풍습을 알 수 있다. 덕흥리 벽화무덤도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 고분 입구는 철문으로 굳게 닫쳐 있었다. 일반에게 개방하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 입장료를 주겠다며 협상을 시도했다. 고분관리소 측이 일인당 20유로를 요구했다. 우리가 10유로로 깍았더니 너무 적다며 불가하다고 했다. 농업생산조합 일행은 고분 구경을 마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천삼 농산물생산조합을 방문했다. 이 조합은 자치권이 강한 노조로 알려져 있었고 규모도 제법 커서 자치행정실, 위생실, 강당, 판매홀 등 여러 부속 건물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농민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부조합장이 우리를 맞았다. 그는 조합원들이 지난 수 일 동안 초과노동을해서 오늘은 하루 쉰다고 했다. 시설을 한 번 둘러보고 난 후 조합에서 운영하는 판매소로 들어갔다. 아내는 말린 곶감을 10개 샀다(독일에 돌아와 수정과를 만드려고 꺼내보니 이미 상해서 모두 버렸다). 우리는 부조합장의 안내로 근처에 사는 조합원의 집을 방문했다. 아담한 단층 기와집, 집 둘레 텃밭엔 감자, 파, 콩, 고추, 상치, 당근, 배추 등이 자라고 있었고 마당엔 닭이 먹이를 찾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낯선 사람들을 발견한 개가 사납게 짖는다. 현관문을 열어준 집주인은 외국인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닌듯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를 맞았다. 그녀는 친절하게 집안 곳곳을 보여주었다. 방은 모두 3개였는데 방 두개는 정지(부엌)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있었고 정지는 마루를 깔아 방처럼 만들었다. 개량식 정지다. 재밌는 것은 솥들이 걸려있는 쪽 마루바닥에 사각형 모양의 뚜껑이 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아래에 연탄을 넣는 화덕이 있었다. 연탄으로 밥을 짓고 나면 화덕을 구들 속으로 밀어 넣어 난방을 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화장실은 집 건물 밖에 따로 있었다.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문을 열고 들여다 보니 화장실 안은 어둡고 변기 없이 네모난 구멍만 흐릿하게 보였다. 용변을 보려고 했는데 은근히 겁이 났다. 안내인 설명에 따르면 2009년부터 농가당 100 제곱미터까지 토지를 분양받아 여기서 생산되는 작물을 자유롭게 처분하고 있다고 했다. 6인 이상의 농가는 토지를 더 많이 할당받을 수 있다. 또 북한은 식량 부족을 극복하기 위한 정부차원의 대책으로 제1 방향: 필요한 종자와 경작방법을 조속히 개발하고, 제2 방향: 연 2회 수확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며(예를 들어 벼농사 전에 당근이나 겨울 곡물을 심기), 제3 방향: 감자를 대량 생산해 주식으로 전환하기(관서지방에서 시험중) 그리고 제4 방향: 개간되지 않은 땅에도 콩 등의 곡물을 심기 등 모두 네가지 방향을 연구 실험하고 있다고 했다. 안내인은 북한의 급여와 은급제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미혼인 지방의 관광안내인의 월 급여는 유로화로 10 유로정도이고 이 외에 의복과 식량을 별도로 배급 받는다. 혼자서 생활하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다고 한다. 내가 2003년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들은 바에 의하면 교사의 급여는 월 30유로 정도였다. 현재 개성공업단지에서 일하는 북한근로자의 월 급여는 미화 50 불 수준. 내가 1998년 독일-북한 합작제약회사 설립을 추진하던 당시 약국 종업원 급여를 미화 50불로 정했었는데 현재와 비교해도 상당히 좋은 조건이었던 것 같다. 북한의 정년은 남자 60세, 여자 55세다. 연금은 공로포상 10개 이상 수상한 자는 최종 급여의 100% 수령하며, 공로포상 6-9개 받은 자는 최종임금의 80%를, 공로포상을 한 개도 못받은 사람은 최종 급여의 50%만 받는다고 한다. 노인들 부양문제는 원칙적으로 장남이 부모를 부양하는 전통을 이어간다. 자식이 없는 노인들은 양로원으로 들어간다. 북한에서는 의사, 교수, 교사 등의 직업이 가장 인기가 높고 사회적으로 우대를 받으며 봉급도 공무원보다 높다. <다음 호에 계속~> 글: 김영상박사, 사진: 부인 김일제 정리: 유로저널 프랑크푸르트 김운경 woonk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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