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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2013.03.18 02:42
60년만에 다시 찾은 내 고향 북녁땅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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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저널 단독보도 재독동포 김영상박사 북한방문기 60년만에 다시 찾은 내 고향 북녁땅 (8) 김영상박사(81)는 개성에서 출생해 당시 6년제인 개성중학교를 다니던 중 6.25를 만났다. 18세의 나이에 미 보병 25사단 예하 35연대 군속으로 종군하면서 가족과 헤어진 것이 오늘에 이른다. 김씨는 서울공대를 졸업한 후1958년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 하노버 공대(석사)와 슈투트가르트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공학박사)했다. 김박사는 MAN회사, Hoechst 화학회사 등 독일 유명 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1994년 정년 퇴직했다. 그는 재독한국과학기술자협회장, 프랑크푸르트 한국문화회관 대표를 역임했고, 현재 거주지인 하터스하임(Hattersheim)의 외국인 후원정책팀 고문직을 맡아보고 있다. 독일인 아내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이 기행문은 일기형식으로 꾸며졌으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취재기자(김운경)가 정리했다. 5월11일(금) 역사의 현장 판문점으로 1992년 김일성 80회 생일을 기념해 개통한 것으로 알려진 『평양-개성 고속도로』는 북한이 최초로 건설한 4차선 아스팔트 도로다. 20년 세월을 지나는 동안 도로는 금이가고 곳곳에 패인 곳이 많았지만 제대로 보수가 되어 있지 않았다. 고속도로 중간중간 넓게 길이 닦인 곳들이 있어 그 이유를 알아보니 유사시에 군용기 활주로로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고속도로 좌우에 펼쳐진 넓은 논에 농부들이 허리를 구부린 채 열심히 모를 심고 있었다. 개성과 해주 일대는 북한에서 가장 큰 평야지대다. 멀리 초가들이 보였다. 버스가 휴전선으로 가까이 가면서 군 경비가 삼엄해졌다. 사진촬영이 일체 금지되었다. 도로변에는 거리를 나타내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판문점 50km 지점: 첫번째 검문소에서 군인들의 검문을 받았다. 33km 지점: 전차 차단 시설( 도로 양쪽에 설치한 높이가 10m, 두께 1m 이상의 콘크리트 구조물, 유사시 폭약을 터트려 무너뜨림) 통과, 18km 지점: 두번 째 검문소와 전차 차단 시설 통과, 16km 지점: 세번 째 검문소와 전차 차단 시설 통과, 6km 지점: 전차 차단 시설 통과, 3km 지점: 네번 째 검문소와 전차 차단 시설 통과. 오른쪽으로 새로 조성한 동네가 보였다. 왼쪽에는 개성시가 있었다. 버스는 서행하며 다시 전차 차단용 구조물을 통과했다. 그리고 마침내 북측 최종 검문소에 이르렀다. 버스에서 내리니 이미 우리팀 외에 상당수의 관광객들이 와 있었다. 안내원 K가 시간이 꽤 걸릴테니 판매소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우리는 판매소에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판매품은 개성인삼류(술, 차, 액스, 분말 등), 의류, 버섯, 명주포, 그림, 김일성 저서, 음료수 등이었다. 놀랍게도 여기에 평양에도 없던 ‘코카콜라‘가 있었다! 인삼 제품은 더러 팔렸으나 다른 상품들은 거의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휴전선이 가까와 지면서 남북이 대치하고 있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 앞에 3m 가량의 철조망이 벽처럼 둘려져 있었다. 철조망 사이에 출입구가 있었고 좁고 높은 통로 양쪽에 무장한 두 명의 경비병이 무표정하고 긴장된 모습으로 서있었다. 북방경계선을 넘어 마지막 콩크리트 구조물을 통과해 4km거리의 비무장지대를 지나면 공동경비구역에 도달할 것이다. 좌측으로 약 20m 떠러진 곳에 6.25때 중단된 ‘경의선 철로’가 보였다. 판매소에서 한 시간 이상을 보냈을까, 관광객들을 불러내더니 마당에 세워놓고 군대식으로 2 열로 도열시켰다. 관광객은 미국, 일본, 노르웨이, 인도, 독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군인 인솔하에 좁은 통로를 지나 약 200m 를 걸어 비무장지대로 들어갔다. 그곳엔 버스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매우 느린 속도로 판문점을 향해 천천히 진행했다. 북한 병사 한 명이 우리를 수행했다. 판문점에 버스가 정차하자 북한장교가 우리팀을 인수하더니 한 건물 앞으로 데리고 갔다. 정전회의장과 정전협정조인장 6.25 정전회의장은 공동경비구역 북한쪽에 있다. 이곳에서 1951년말부터 1953년까지 정전협정이 진행됐다. 널찍한 홀 안 우측에 책상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좌측 책상 위에는 UN기가 꽃혀 있고 우측 책상에는 북한기가 있었다. 실내 벽 가득히 관련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 정전 협정 당시의 광경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정전회의장에서 약 30m 떠러진 곳에 협정조인장이 있다. 바로 이곳에서 1953년 7월 27일에 UN군과 북한군 사이에 정전 조인식이 있었다. 정전회의장과 같이 촤측 책상 위에는 UN기가, 우측 책상에는 인공기가 꽃혀있다. 책상 가운데에는 가로와 세로가 약 40cm, 높이는 약10cm 되는 유리상자가 놓여 있고 이 안에 당시 조인된 정전문서 사본이 들어있었다. 건물입구에 세워진 대리석으로 된 기념탑에는 크게 한글로 쓴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진한 빨간색의 글자들이 섬뜩하리만큼 선명하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에서 침략전쟁을 도발한 미제국주의자들은 영웅적 조선인민 앞에 무릎을 꿇고 이곳에서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이 비문을 본 외국인들이 6.25전쟁의 도발이 남한인지 북한인지 헷갈려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우리는 공동경비구역을 둘러 보기로 하고 북한의 판문각 아래쪽 목조건물로 향했다. 공동경비구역(JSA)은 군사분계선상에 세워진 회담장을 축으로 하는 반경 400m의 원형지대로, 유엔 측과 북한 측은 1954년 11월 8일 남북 4km의 비무장지대 내에 군사정전위원회 본부지역을 설정하고 그 안에 공동경비구역을 두었다. 쌍방이 35명씩 군인들을 배치, 공동경비임무를 맡아오다가, 2004년 10월 유엔 측의 경비업무가 한국군에 완전 이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파란색의 목조건물은 텔레비젼에서 이따금 봤던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이 열리는 바로 그 장소였다. 모두 다섯 동의 목조건물들이 옆으로 나란히 있었다. 인솔자가 우리를 가운데 건물로 안내했다. 홀 한 가운데 긴 테이블이 있고 테이블의 남북 중간지점을 따라 전화선이 길게 놓여있었다. 이 전화선이 지나는 곳이 바로 남북의 군사분계선. 바라보고 있자니까 기분이 묘해졌다. 이 회담장 안에는 보통 양측 경비병이 2명식 남쪽 및 북쪽 입구에 부동자세로 근무한다. 재밌는 것은 이 건물 안에서는 남북 경계선에 규제 받지 않고 누구나 넘어다닐 수 있다는 것. 일반 방문자도 자유롭게 책상의 남북을 왔다갔다 할 수있다. 회담장을 나오면 건물 중간부분에 청색으로 남북을 가르는 경계선이 칠해져 있다. 엄정하게 보이는 이 선을 고의든 실수든 넘어가는 경우에는 즉시 총격전이 벌어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우리가 방문하던 날, 건물 안에는 북쪽 경비병만 두 명 있었고 남한쪽 경비병은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들으니 얼마 전부터 남북이 합의했는데 한쪽에서 방문객을 인솔해오면 다른쪽 경비병은 자리를 피해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회담장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허용됐다. 모두들 실컷 사진을 찍었다. 북한 판문각에서 회담장 건물에서 나와 오던 길을 되돌아 가 북한 판문각으로 들어갔다. 3층 건물인데 2층에 넓은 발코니가 있다. 여기서 바라보는 DMZ 풍경이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평화가 더없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회담장 건물 앞에 북한군 두 명, 뒤에는 남한 헌병 두 명이 서 있었다. 다시 남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북한 판문각과 비슷한 크기의 남한 판문각 건물이 보였다. 비무장지대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남북의 대치상황이 얼마나 치열한가 하는 점이었다. 사소한 경우라도 매우 도전적으로 대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남한쪽 최전방 마을 댸성동에 100m 정도의 깃대를 세웠더니 북한에서 곧바로 150m 가량의 깃대를 세웠다거나 국기의 크기도 경쟁적으로 크게 하는 점들이다. 뿐만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확성기를 설치해 놓고 엄청난 볼륨으로 선전방송을 해댔다. 1998년 내가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양쪽의 스피커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종이로 귀를 틀어막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번 방문에서는 너무도 조용했다. 양쪽 모두. 북한의 안내장교의 음성도 부드러웠고 미국이나 남한에 대한 비방도 하지 않는 것이 매우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내 고향 개성으로 판문점을 떠나 내 고향 개성으로 향했다. 개성은 원래 38선 이남 땅으로 남한에 속해 있었다. 개성 인구는 현재 30 만명쯤된다. 1998년에 20만명 이라고 들었는데 15년 사이에 10만명이 더 늘었다. 8년 전 남한에서 개발한 개성공업단지 덕분에 개성의 경제적 가치가 크게 부각되면서 인구도 늘었다고 한다. 현재 50,000명 이상의 북한 근로자가 개성공단에서 일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글: 김영상박사, 사진: 부인 김일제 정리: 유로저널 프랑크푸르트 김운경 woonk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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