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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2013.10.19 22:33
독.한 협회 NRW 지회, 2013년 자유북한 북한인권에 대한 심포지엄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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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협회 NRW 지회, 2013년 자유북한 북한인권에 대한 심포지엄 개최 매년
10월 이 되며 우린 독일 통일과 개천절이 함께하는 10월 3일 행사를 여기저기서 하게 된다. 독일의 통일 은 한반도 통일 에 대한 새로운 신념과 희망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독.
한 협회NRW 지회에서는 독일통일을 기념하면서 올해도 자유북한 북한 인권 에대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먼저 안순경 지회장은 민주주의 의 역사를 보존하는 역사적인 도시 본(Bonn) 시 Naas 시장과 주독대사관 본 분관 이찬범 공사에게 적극 후원해주심에 감사하고 협력해준 본 대학의 오상이 박사, Herr Schreiweis,
국제인인권 Schreimacher 교수 에게도 감사 표시를 하면서 독일은
1989년과 1990 년에 평화로운 혁명으로 통일이 되었지만 아직도 분단된 한반도에도 희망과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반듯이 통일은 올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통일의 길이 바로 북한의 인권 을 지킬 수 있는 길이고 이 길이 한반도의 완전한 자유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일이기에 독.한 협회에서는 이런 심포지엄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임무를 행한다고 하면서 개막 인사를 했다. 본 시 나스 (Naas) 시장은 독.한 협회에서 통일을 이룩한 역사적인 도시 본에서 이런 행사를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특히 북한의 인권 옹호에 대한 행사에 적극 찬사를 보낸다고 했다. 본 대사관 분관 이찬범 공사는 독.한 협회에서 북한인권에 대한 심포지엄을 통해 널리 알리고 토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일에 찬사를 보낸다고 했다. 북한의 국민들이 얼마나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지는 그들의 평균신장은 남한국민에 비해 7센티가 작아졌다며 실질적인 예를 들어 주었다. 프랑크푸르트 국제 인권협회 Schirmacher 교수는 인권 옹호에 대한 구체적인 이론을 국제법으로 해결 할 수 있는 길을 설명해 주었다. 기차사정으로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김영순 씨와 김봉기 씨, 강연은 좀 늦게 시작되었지만 관중들의 관심을 긴장 속으로 끌었다. 먼저 김영순 씨는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는 죄로 9년동안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부모 자식을 잃어야 되었던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 했다 그녀는 성혜림과 중. 고등학교, 대학을 함께 다닌 가장 친한 친구였다. 함께 예술대학을 다니면서 성혜림을 연극을, 본인은 무용을 전공했는데 이들은 북한 의1% 밖에 안 되는 고위층에 소속되는 생활을 했으며 김일성을 위해서 무용공연도 자주했고 김일성 으로부터 선물도 받았다. 성혜림은 다른 고위급 장교와 결혼을 했었지만 김정일은 이들을 강제로 이혼하게 만들고 성혜림과 결혼을 한다. 1970년 나는 무슨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는 채 내가 성혜림의 친구라는 이유 때문에 요독 수용소 15번으로 가족 7명과 함께 끌려왔다. 1979년 까지 그녀는 부모의 죽음과 아들의 죽음을 비참하게 견디면서
2000년에 수용소탈출에 성공했다. 수용소 생활은 밝을 때부터 어두워 질 때 까지가 작업시간인데 이 수용소 생활은 폴란드에 있었던 아우슈비츠보다 더 비참하다 고 했다. 1972 년 두 명의 도망자가 공개처형을 당했는데 이때 가족이나 친지들 누구든 슬픈 얼굴을 하면 함께 처형된다. 슬퍼도 무표정 해야 되는데, 차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무표정도 배워야 했다. 내 남편은 아직도 북한에 존재하는 돌아오지 않는 수용소에 있는 데 생사의 여부를 알 길이 없다. 수용소 안에서 는 무슨 죄를 지은 지도 모르면서 날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굶고 병들어 죽는 사람들이다. 자유민주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북한 정치범수용소에서는 날아다니는 곤충과 짐승 기어 다니는 벌래 땅 위에 솟아나는 풀들을 모두 뜻어먹고 잡아먹으면서 또 독이 올라 죽기도 한다. 지금 나는 호흡장애에 걸린 48세된 아들과 함께 남한에서 살고 있는데 난 자식이 4명 있었지만 며느리도 없고 사위도 없고 손자도 없고 영원히 길이 없다. 자유 대한민국에 와서 드디어 숨을 쉴 수 있고 북한의 정치체제가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는 체제 인지 뼈가 아프게 느껴진다. 이제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잃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북한의 인권 침해를 온 세상에 알려 하루 빨리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가 철폐되는 일이다. 이런 일을 위해서라면 밤새 기차를 타고 다녀도 새벽 일찍 일어나는 일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서 78세의 고령에도 많은 열정을 가지고 지난날의 비통함을 이야기했다. 다음 김봉 씨는 인간성을 개조시키는 쇠뇌 교육, 수령을 위해서는 자살까지도 해야 되는 이유,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지도자들의 모습을 잘 나타낸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이 세가지 문제가 분단의 장벽이 무너질 수 있는 중요점이라고 하면서 현 대한민국에는 2만6천 만 명의 탈북자가 살고 있으며 중국 유럽 호주 미주지역에 모두 10만명의 탈북자가 살고 있는데 대한민국은 언제라도 이들이 대한민국으로 올 수 있는 여러 방면으로 이들의 길을 도와줄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한다. 김영순 씨는 누군가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많은 피난민들의 시체가 두만강에 떠다니고 굶어 죽고, 맞아 죽고 공개처형으로 많은 국민이 죽어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녀가 매콩강을 건너며 150번 넘어지면서 드디어2003년 아시아나 비행기 탈북자 좌석에 앉았을 때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지금도 감격한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요덕 수용소에서 9년을 살아본 사람은 더 큰 행복을 바랄 수 없다고 하면서, 북한에는 인권이란 단어도 없으며 주민들의 삶은 오직 수령을 위해서 있는데 자유민주주의서는 있을 수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번 행사에는 젊은 학생들이 많이 참여했는데 북한인권 옹호에 대한 절실함과 몰랐던 점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하며 주최측에 초대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안순경
NRW지회장은 행사를 마치며 이번 행사를 도와주시고 후원해주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했으며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한반도 통일을 위해 북한의 인권 옹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끼며 하루 빨리 정치범 수용소가 사라지기를 희망했다. 독일 유로저널 오애순 기자(mt.199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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