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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2007.04.10 02:09
테이트 모던으로 가는 길 (한 예술가의 영국그리기)
조회 수 1305 추천 수 0 댓글 0
영국에 온지 채 한 달도 안되었을 때다. 아직은 영국의 2층 버스가 너무 새롭고 길을 가다 만나는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도 마냥 신기하며, 영화에서만 본듯한 유럽풍의 오래된 건물들 사이를 지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때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 처음으로 사귄 외국인 친구가 일본에서 온 나오미였다. 물론 나도 영어실력이 신통치 않았지만 그 애 또한 말보다 눈웃음과 제스처를 통해 나에게 의사전달을 하곤 했었다. 주말에 런던을 갈 거라는 내 말에 - 난 Colchester에서 공부 중이었다 - 나오미도 선뜻 같이 가자고 제의했다. 이렇게 해서 둘만의 짧은 런던여행을 시작했다. 복잡하게 엮어진 버스 노선들과 갈아타는 것 또한 표지판을 찾아 다른 정류장으로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날 정신 없게 했지만 영국생활을 나보다 먼저 한 나오미의 재빠른 움직임으로 난 그냥 그녀의 뒷모습만 보면서 따라가면 됐었다. 노팅힐에 들러 길가에 벌여진 온갖 다양한 물건들을 구경한 후 테이트모던을 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탔다. 이날 하루 종일 수십 번이 넘게 버스를 탔지만 나에겐 모두런던 곳곳의 숨겨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sightseeing이라고 쓰여진 런던관광버스 같았다. -사실 같은 노선을 가는 버스를 여러 번 탔겠지만 그때 당시 내 눈엔 모든 것이 새로웠다- 테이트모던은 미국의 MOMA처럼 현대미술의 움직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거대한 전시공간이며 미술을 하는 사람뿐 아니라 일반 관광객 또한 내셔널갤러리처럼 으레 한번쯤 들렸다 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리는 나에겐 뭐랄까. 거대한 성과 같다. 그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뛰게 만드는 것 말이다. 성을 들어갈 수 없는 가난한 어린 소녀가 까치발을 하고 담 넘어 화려한 파티를 보면서 마치 어여쁜 공주님이 된 양 자신의 행복한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처럼, 나 또한 내 작품들이 그 거대한 전시공간에 놓여져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한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을 드높힐 수 있는 날을 상상하게 만든다. 다행히 그 소녀에게는 성을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겠지만 난 당당히 들어갈 수 있다. 입장료도 없다. 저 멀리 밀레니엄 다리 넘어 테이트모던의 모습이 보인다. 공장을 개조해서 만들어서인지 뾰족하게 솟아 오른 굴뚝 같은 건물의 기둥에서 당장이라도 연기가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거기에선 Racheal Whiteread 와 그 외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 중이었다. 나에겐 경쟁자이기도 하며 같은 시대 예술을 하는 동지지만 그 작가들은 나를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미 멋지게 성공한 작가로서의 그들을 인정할 수 밖에. 그리고 그들을 넘어서는 수밖에. 저 다리만 넘으면 되는 것을, 나를 멈추게 하는 한 사람이 밀레니엄 다리 바로 앞, 한 모퉁이에 있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로 뭔가를 열심히 바닥에 붙어 하고 있었으며 소수의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열심히 거리 사진을 찍고 있는 나오미를 불러 그 곳으로 가보았다. 그림이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한 방을 가득 채울만한 크기의 캔버스 천을 바닥에 펼쳐놓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작은 돈 통을 옆에 놓고 말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작품인 듯한 그림을 옆에 펴놓고 그것을 똑같이 그 큰 공간에 채워놓고 있었다. 보아하니 스케치는 다 되었고 채색도 어느 정도 된 것이 거기서 그렇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며칠은 되어 보였다. 그 날 기온은 영하 5도는 족히 되었을 정도로 매서운 추위였다. 사람들은 짧은 시간 그의 작품을 보고는 옷을 여미고 훌쩍 가버리기도 하고, 몇몇의 사람들은 동전을 던져 주기도 했다. 이런 그의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한 일인지, 아님 저기 멀리 보이는 테이트모던이라는, 그를 불러주지 않는 대형 갤러리에 항의를 하고픈 것이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 모습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한다. 재정적으로 큰 뒷받침이 없는 대부분의 젊은 예술가들은 돈을 버는 것과 작업을 하는 것 사이에 많은 갈등과 고민이 함께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하는 것에 시간을 투자 해야 하는데, 많은 시간이 또한 새로운 작업을 창조하는데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일석이조인 셈이다. 돈을 벌고 작업을 하니 말이다. - 그런데 과연 이렇게 거리에서 벌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될까 - 4년 전 홍대 앞 낡은 벽에 누군가가 이런 글귀를 새겨놓았다. '예술이 돈이 되는 것을 보여주마' 그리고는 환경정화원에 의해 지워졌는데 다시 거기 위해 이렇게 적어놓았다. '그래도 예술이 돈이 된다는 걸 보여주마' 이 사건은 당시 우리들에게 큰 이슈가 되었으며, 술 한잔하는 자리에서는 으레 그 글귀를 들먹이고는 우리끼리 술잔을 부딪치며 열심히 현실과 싸우고 있는 많은 예술가를 위해 건배를 하곤 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냥 누군가의 장난이구나 하고 여길 일이었으나, 우리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에게는 영 남의 말 같지가 않다. 얼마나 저 사람도 그림과 돈이라는 두 가지 길에서 고민하고 힘들어 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이다. 차가운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 젊은 예술가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동전을 다 내주고는 테이트모던으로 다시 향했다. 적어도 나나 저 거리의 작가보다는 먼저 여유로움을 가진 작가들의 작품이 있는 곳 말이다. 밀레니엄 다리를 걷고 있는 내게로 조금씩 다가오는 그 모습이 너무나 얄밉다. 하지만 미워할 수 있겠는가? 미워하기엔 너무 사랑하는 것을. 그냥 꾸준히 오늘도 현실과 부딪히며 작업을 해야겠다. 다시 가볍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오미와 함께 그 성에 당당히 들어갔다. * 이 글의 작가 김현화는 영국에서 작업활동을 하는 화가이다. 영국에서 일어나는 문화적인 사건이나 전시, 혹은 시각적인 예술성이 보이는 영상 등을 주된 소재로 다루며 그에 관한 작가의 생각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정기적으로 에세이를 쓴다. 김현화 기자 처칠 컬리지 미술강사 hhpeanut@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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