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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앙 Ta'ang 왕 빙 Wang Bing, 프랑스 개봉 2016년 10월 26일 버마 소수민족인 타앙족은 오늘도 게릴라와 정부군의 내전을 피해 중국 경계선을 넘어 고난한 피난길에 오른다. 타앙족의 난민생활은 여전히,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타앙>은 이들의 일상과 그 현장에 있었던 감독의 시간을 함께 담고 있다. 감독은 망각 속으로 사그라져가 버릴 순간들을 카메라로 기록하고 있다. <타앙>은 버마 내전으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타앙족에 대한 아주 간단한 자막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설명을 부가하지 않는다. 중국과 버마의 국경선 산중턱 어디쯤에 모여 있는 타앙족 한 무리들이 천막집을 짓는 것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그저 이들의 일상을 따라갈뿐이다. 여자와 아이들이 대부분인 타앙 난민들은 장소를 옮겨가며 잠자리를 만들고 끼니를 때운다. 그리고 전파가 잡히는 장소를 찾아 핸드폰으로 떨어진 가족들과의 통화를 시도한다. 카메라를 향한 구호나 극적인 인터뷰는 없다. 감독은 반복되는 이들의 고통스럽고 지난한 일상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그저 쫓아간다. 산 너머 어디선가 들려오는 크고 작은 포탄 소리에서 외부에서 밀려오는 위협이 감지되고 열악하고 불안정한 삶의 조건은 이들이 처한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더이상 도망 다니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열망이다. 이 간절한 열망은 공포를 견디고 어떻게든 생존하는 것이 최고의 저항의 다른 말일 것이다. 굳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현실에서 추출한 이미지이고 인물들의 삶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지속된다는 것을 환기하지 않더라도 이들의 '존재하기'위한 싸움의 시간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어떤 이는 <타앙>을 통해 심각한 난민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구할 수도 있다. 소수민족으로 농사를 지으며 평온하게 살고 있던 한 소수민족이 어느 날 갑자기 정부와 반정부세력과의 갈등 그리고 마피아까지 개입된 내전의 희생양이 되어 떠돌이가 되고 만다. 난민들의 삶의 현장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감독은 박해 받는 사람들의 실상 폭로를 통한 어떠한 전언을 외치는 영화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타앙> 속에는 군인들도 게릴라도 보이지 않는다. 타앙족은 국경근처 중국 사탕수수밭에서 일당을 벌고 있지만 중국인 또한 보이지 않는다. 타앙족을 제외한 모든 것은 외화면에 위치한다. 이 영화는 오롯이 타앙족을 위한 것이다.
지저분한 바닥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관음적이지 않다. 카메라를 직접 든 감독은, 강박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찍히는 사람과의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한다. 카메라의 위치는 위협적이거나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숭상하지 않는다. 촬영이 진행되고 있는 이 순간 찍는 사람과 찍히는 대상과의 교류를 시도한다. 걸을 수만 있다면 떠나야 한다는 한 인물의 말처럼 최소한의 짐을 가지고 피신처를 찾아 끊임 없이 이동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감독은 필사적으로 따라간다. 롱테이크(화면을 끊지 않고 길게 찍기)로 이들의 일상을 묵묵히 지켜보는 감독의 시선은 우리에게 이 시간을 함께 보내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정치경제적 맥락에 무지해도 된다. 영화 또한 우리에게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할 뿐이다. 지금 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라는 의미다. 그럼으로써 존재의 숭고함을 느끼고 인간의 생명력을 체험해 보라는 것이다. 영화의 긴 시간을 할애한 밤 장면은 한 편의 쓰라린 서정시다. 어두운 천막 안에서 작은 손전등만이 이들의 얼굴을 비추고 모닥불에 모여 앉아 고향에 남은 가족들과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 미의 대상으로 보여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빛아래의 사람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모든 것이 열악하고 위태로운 시간들이 이들의 얼굴을 함께 인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으로 변한다. 존엄한 생명의 에너지에 대한 감독의 헌사다. 변방에 배제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중심의 권리를 복원시킨다. 감독의 시선은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고 이는 찍히는 대상에 대한 '예의'다. 역사가 외면하고 있는 민초들의 작은 삶을 담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왕 빙감독은 현재 중국영화계의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해외 영화제에서나 간간히 소개되며 긴 상영시간을 요구하는 그의 작품들이 개봉의 기회를 얻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왕 빙감독은 자본의 논리에 편승하기를 거부한 열악한 작업환경(중국의 엄격한 검열시스템도 무관하지 않다) 속에서도 뚝심 있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그는 묻혀있고 잊혀져 가는 사람들을 영화의 중심으로 끌어온다. 영화사의 전환점을 가져온 디지털카메라의 덕이기도 할 것이다. <사진: 알로씨네> 프랑스 유로저널 전은정 기자 Eurojournal18@ek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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