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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과학 데이’란 큰 연례행사가 있었다. 35년 4월19일 열린 제2회 행사는 아주 성대했다. 이인?윤치호?현상윤?주요한 등 당시 조선의 지식층이 많이 참가했고, 주요 신문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종로거리에서는 서울에서 총동원했을 54대의 자동차가 군악대를 앞세워 행진을 벌였다. 홍난파가 작곡하고 김억이 작사한 ‘과학의 노래’가 평양, 원산, 개성에서도 울려퍼졌다. “새 못 되야 저 하늘 날지 못하노라/ 그 옛날에 우리는 탄식했으나/ 프로페라 요란히 도는 오늘날/ 우리들은 맘대로 하늘을 나네/ 과학 과학 네 힘의 높고 큼이여/ 간 데마다 진리를 캐고야 마네.” 과학 대중화운동의 선구자 김용관(1897~1967)이 주도한 이 행사는 과학으로 독립 역량을 키우자는 민족적 염원을 담고 있었다. 19세기 말 중국과 일본에서는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부국 강병’과 ‘과학 입국’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과학은 나라 구하는 일에 비해 너무 한가한 일이었다. 헤이그 특사였던 이상설은 1900년에 <산술신서>라는 책을 낸 수학자였고, <독립신문>의 서재필은 처음으로 서양 의학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 바람에 우리나라는 ‘과학의 세기’라는 20세기를 단 한 명의 훈련받은 과학자도 없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과학기술은 식민지의 한을 떨쳐버릴 수단으로 사람들의 마음 깊이 각인됐다. 여기서 과학기술은 무조건 옳은 것, 좋은 것이란 맹목적 믿음이 자라났다.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 과정에서 과학기술은 잘살기 위한 유력한 도구로 자리잡았다. 과학연구 과정에 필요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도구주의적 과학관이 뿌리내렸다. 김용관이 사회계몽을 위해 ‘과학의 생활화, 생활의 과학화’를 외쳤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 운동과 경제성장을 위해 ‘전국민의 과학화’를 주창했다. 과학기술은 경제성장의 도구이자 선진국 진입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하는 ‘과학기술 중심사회’나 요즘 언론의 ‘그래도 과학이 희망’이라는 안간힘도 별로 다르지 않다. 이렇듯 과학을 절대적 진리로 믿고 만병통치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바로 그게 과학주의다. 황우석 사태 때 대중을 지배한 정서는 “먹고살기 바쁜데 웬 윤리타령이냐”는 것이었다. 세계적인 과학사기로 기록될 거짓과 기만이 잇따라 드러나고 있는데도 그의 후원회 가입자 수가 오히려 늘어나는 역설은, 과학주의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가로막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만큼 과학주의의 그늘은 짙고 길다. 황 교수 사태에서 우리는 과학주의의 파탄을 목격한다. 블랙박스 같던 과학연구 과정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 속에는 데이터의 조작, 권력?언론과의 유착, 하위직 연구원에 대한 억압과 차별, 출세욕과 성과주의 등이 뒤섞여 있었다. 연구실은 과학원리만 관통하는 곳이 아니라 ‘지저분한’ 세상사가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시민들과 투명하게 소통해야 할 필요는 정치나 기업 못지않게 과학계에도 커졌다. 1999년 부다페스트에서는 21세기 과학이 갈 길을 모색하려는 세계과학회의가 열렸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155개국에서 1800여명이 참가한 이 회의는 역사적인 ‘과학과 과학지식에 관한 선언’을 채택했다. 그 핵심은 과학과 사회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과학 연구에서 늘 윤리와 인권을 생각하자는 것이었다. ‘황우석’ 이후 우리 과학계가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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