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 대왕 때 한양 남산골에 사는 가난한 선비 장경문은 몰락한 정승의 후손으로 낡은 집 한 채에 의지해 간신히 연명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민생을 살피고자 암행길에 나섰다가 장경문의 비참한 생활을 본 임금은 사정을 딱하게 여겨 장경문에게 제주 목사의 벼슬을 내렸다.
기쁨도 잠시, 돈 한 푼 없는 장경문이 천릿길 제주도로 부임할 노잣돈이 있을 리 만무였다.
걱정이 태산인데 마침 부인이 좋은 꾀를 내었다. 육방의 아전을 뽑되 밑천을 많이 들인 순서대로 뽑자는 것이다.
이때 새우젓 최대 집산지인 마포 서강가에 사는 배 서방은 그의 아버지가 새우젓 장사로 전답을 꽤 모아 가세는 넉넉했지만 사람이 워낙 변변치 못한 얼간이인데다 건달 기질까지 있어 날마다 술과 기생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배 서방은 돈 천 냥쯤 쓰면 비장 벼슬을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이 솔깃했다.
비장을 뽑는 날 장경문은 사랑방 미닫이문을 열고 거만하게 버티고 앉았다. 배 서방 면접 차례가 되자, 장경문은 어김없이 "재산은 있느냐?" 하고 물었다.
"벼슬을 하는데 재산이 있어야 합니까?" "벼슬아치가 가난하면 반드시 비리가 생기고 백성을 못살게 굴 것이다. 그러므로 재산이 있으면 그런 엉뚱한 마음은 추호도 갖지 않을 것인즉 내 특히 그 점을 참작하여 재산이 있는 자를 비장으로 뽑는 것이다 알겠느냐? 그래 재산은 있느냐?"
"아비가 새우젓 장수라 벼 천 석은 합지요" "으흠 그만하면 됐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장경문은 가까이 온 배 서방에게 조그마한 종이쪽지를 하나 보여 주었다. 종이에는 이방 900냥, 호방 800냥, 예방 700냥, 공방 600냥, 그리고 다시 행을 바꾸어 형방 800냥 등등이 쓰여 있었다.
배 서방이 죽 훑어보니 다른 자리엔 각각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데 이미 팔렸다는 표시고 예방과 형방만이 빈자리였다. 배 서방은 100냥을 더 쓰면 육방의 우두머리 이방을 차지할 수 있는데 벌써 팔려나갔다니 분하기 짝이 없었지만 할 수 없이 800냥을 주고 형방을 사서 비장(裨將)이 되었다.
이게 그 유명한 배비장전이다.
최근 국회의원 공천 헌금이야기로 전국이 들썩이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19대 총선 과정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공천헌금이 오갔다는 의혹이 제기돼 정가에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의혹의 중심에 선 인물은 새누리당 현기환 의원인데 선관위가 검찰에 고발한 모양이다.
국회의원이라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옳을텐데, 봉사는커녕 돈을 주고 의원직을 얻으려 했으니 참으로 딱하다. 돈을 건넨 것이 사실이라면 돈으로 벼슬을 사려 했다는 얘기에 다를 바 없다.
위정자는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부패 사슬에 얽매여 있을 것인가.
지금 새누리당은 흔들리고 있다.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은 서울 상암동 누리꿈스퀘어에서 열린 대선후보 정책토크 자리에서 '공천헌금' 파문과 관련해 사실의 진위와 상관없이 의혹이 얘기되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 유감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현기환 전 의원과 현영희 의원의 전격적인 제명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흡하다는 느낌이 남는다. 지난 총선에서 여권이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전격적인 '공천개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제 철저한 진상조사를 앞세우기로 의견을 모은 것은 국민 여론에 상응하는 조치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과제는 지금부터일 것이다. 문제가 된 현영희 의원 공천 헌금 의혹뿐 아니라 제2, 제3의 공천비리가 있지 않았는지 면밀히 따지고 있는 그대로 국민 앞에 공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적지 않은 국민은 새누리당이 그토록 깨끗한 공천을 외치고도 이 같은 의혹을 자초한 상황을 맞아 그들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곧대로 듣기가 마뜩하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태생이 차떼기당 아니냐. 돈 공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비아냥을 흘려들을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님을 자각해야 한다.
검찰은 이번 사건을 확실히 밝혀야 한다. 여당이라고 어물쩍 넘어가서는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정치권도 그냥 넘어가서는 곤란하다.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 앞으로 이런 돈뭉치 사건이 없도록 해야 한다.
비례대표 공천을 둘러싸고 뇌물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8대 총선 과정에서도 모 의원이 뇌물로 검찰에 기소된 적이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매관매직 행위가 끊이지 않아 씁쓰레한 마음 금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