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한 열혈 시온주의자 청년인 빅터 오스트로브스키는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의 엘리 공작원으로 선발되었다. 청년은 자신과 국가에 대한 자부심에 도취되어 있었고, 조국 이스라엘을 실수를 범할 수 없는 완전무결한 국가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5년 남짓 모사드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그가 경험한 실상은 그의 생각을 180도 바꿔놓고 말았다. 그의 눈에 비친 모사드는 이미 조국을 위한 숭고한 희생과 정의와는 거리가 먼 탐욕과 욕망, 인간 생명에 대한 무시 등이 뒤엉킨 조직일 뿐이었다. 모사드는 조국이 아니라 모사드 조직 자체를 위해 계획을 꾸몄고, 사실을 왜곡해 상부에 보고했으며, 때로는 조직의 이익을 위해 이스라엘을 전쟁으로 이끌었다. 조직을 떠난 뒤 그는 침묵할 수 없었다. 1990년 7월 오스트로브스키는 캐나다에서 모사드의 인물들을 실명으로, 그리고 한번도 알려지지 않은 모사드의 조직도를 폭로했다. 이 책 [By way of deception]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지금껏 모사드를 가장 잘 파헤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20년 전 스치듯 읽은 책을 떠올린 것은 국가정보원의 정치 개입 논란이 지난 댓글 파문에 이어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한 정치공작 문건까지 공개된 덕분이다. 야당은 지난 대선 직전 벌어진 국정원 여직원의 댓글 사건을 “3·15 부정선거에 맞먹는 일”이라고 했고, 여당은 “전형적인 정치공세”라며 맞받았다. 3·15 부정선거와 견준 민주통합당의 해석이 과도하다는 지적에 필자는 동의한다. 후미진 곳을 찾아다니며 댓글이나 단 사건을 고귀한 생명이 희생된 3·15 부정선거에 비교한 것은 옳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이 단순히 저잣거리 시정잡배들의 짓거리에 그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국정원 여직원의 인권도 물론 보호되어야 한다. 하지만 국정원이 정치 개입을 했느냐 여부를 밝히는 것에 비하면 작은 문제다. 44시간 동안 방 안에 감금되는 것도 있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국정원의 정치 개입은 나라의 질서를 흔드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사안이다.
또 하나는 이들 여당 의원이 그동안 국정원이 해온 일을 외면하거나 까먹고 있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터무니없는 의심이라고 했지만 드러나는 현실은 그게 아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종북세력을 찾아낸다는 이유로 정부에 반대하는 시민·종교단체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나왔다. 인권침해와 불법이 저질러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심지어 이른바 박원순 문건은 "박 시장이 세금급식 확대, 시립대 등록금 대폭 인하 등 좌편향·독선적 시정운영을 통해 민심을 오도하고 있어 제어 방안이 긴요하다"고 적고 있다. 반값 등록금 문건에는 "야권의 등록금 공세 허구성과 좌파인사들의 이중 처신 형태를 홍보자료로 작성, 심리전에 활용함과 동시에 직원 교육자료로도 게재"한다고 쓰여있다. 이 문건에는 작성자의 소속과 실명, 직원 고유번호, 휴대전화 번호 등이 적혀 있으며 작성자는 현재 청와대 파견 근무중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국정원측은 문건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수사가 이뤄지면 사실여부가 판가름 날 것으로 기대한다.
지금 국정원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오스트로브스키가 폭로한 모사드의 그것에 못지않다. 모사드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았다. 또 모사드 지휘부는 자기들과 모사드에 최상의 이득을 가져다주는 활동만 승인했는데, 이는 반드시 국가의 이익과 부합하지 않았다는 게 오스트로브스키의 믿음이었다.
‘원세훈의 국정원’에도 똑같은 의심이 제기된다. 국익보다 이명박 정권의 안위를 우선시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국정원이 어떤 일을 했는지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꽤 있다. 민간단체를 감시하다 들킨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사에 광고를 준 기업에 전화를 걸어 압력을 넣었다는 증언이 수두룩하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로 되돌아갔다는 말이 많았다. 이런 일을 하다 스트레스를 받은 국정원 직원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의혹들을 밝히지 않고 국정원이 제자리를 잡길 바란다면 소가 웃을 일이다. 국정원을 감싸며 진실 규명을 막아서는 새누리당 의원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똑바로 알아야 한다. 한국의 오스트로브스키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