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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1 19:10
민주주의 시험대, 밀양
조회 수 2362 추천 수 0 댓글 0
밀양 765㎸ 초고압 송전탑 건설현장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공사를 강행하고자 1000여 명이 넘는 경찰과 한전 직원들이 투입된 가운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무덤까지 파고 버티고는 있으나 언제 극한 충돌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의 도가니에 싸여있다. 8년간 반복되어온 밀양 송전탑 공사를 둘러싼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비상한 상황이다. 정홍원 국무총리마저 국책사업이란 이유로 강행 속내를 드러낸 마당에 정부와 한전은 해당 지역 주민의 절규에도 공권력을 앞세워 밀어붙일 태세다. 천주교 등 종교계와 시민사회, 정치권의 반대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몸부림에도 무엇 때문에 송전탑을 세워야만 하는지 불통도 이런 불통이 없다. 한전은 내년 여름 영남 지역의 전력 피크에 대비하기 위하여 신고리 3·4호기를 하루빨리 건설해야 하고, 전력 송전을 위하여 신고리-북경남 송전선로 건설공사 가운데 잠정 중지 상태에 있는 밀양시 4개면 구간을 서둘러 재개해야 한다고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신고리 3호기의 핵심부품 가운데 하나가 원전비리와 얽혀 안전성이 의심받고 있는 처지라 준공이 1년 가까이 지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또한 이미 노후하여 이번 여름 내내 고장을 일으킨 고리원전들은 가까운 시일 내로 폐쇄되어야 마땅하고 그렇다면 장차 송전선이 더 필요할 이유도 없다. '희생'은 강요돼선 안 된다. 국가, 다수란 이름으로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선 안 된다. 그게 용인된다면 올바른 민주주의 국가라 할 수 없다. 밀양 송전탑을 두고, 정부와 한전은 주민과 1천 번 이상 협의했다고 한다. 장관, 국무총리까지 나서 설득을 시도했다고 한다. 할 만큼 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게 경찰 수천 명을 동원해 공사를 강행할 명분은 될 수 없다. 평생 땅만 일구며 살아온 노인들에게 삶을 터전을 내놓으라는 강요를 정당화할 수 없다. 천 번을 협의해도 답을 찾지 못한 것이 과연 그들만의 탓일까. 대화는 대등함을 전제로 한다. 한전과 정부가 과연 그런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협의는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횟수가 답이 될 수 없다. 횟수가 중요하다면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다. 천 번이 모자라면 100번 더 하고, 그도 모자라면 2천 번이라도 감내해야 한다. 국책사업이라도 생존, 인권에 앞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돈을 더 받기 위해 생떼 쓴다는 비판이 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경찰과 맞서고 있는 노인들은 그냥 그대로 살게 해 달라고 호소한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농사 지으며 살고 싶단다. 그들의 요구는 생존과 평화로운 삶이다. 정부나 한전 주장대로, 송전탑이 시급하다면, 대통령이 나서 설득해야 한다. 장관, 총리가 제 역할을 못 했으니, 대통령이 나서야 하는 건 당연하다. 민원현장까지 대통령이 가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구시대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라고 답하고 싶다. 밀양송전탑은 단순한 민원현장이 아니다. 국가 에너지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되물음이며, 민주주의의 또 다른 시험대가 되고 있다. 한국의 전기 공급체계는 '소비는 서울, 생산은 지방'이란 기형적 구조를 갖고 있다. 서울은 전국 전기 소비율의 30~40%를 차지한다. 원전이나 화력발전소는 멀리 지방에 지어 놓고 3만㎞가 넘는 송전선을 설치해 전기를 끌어다 쓰고 있다. 위험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발전소는 뚝 떨어진 지방에 몰아 놓고, 농민들에겐 제 살과 다름없는 농토에 거대한 철탑을 세우면서 국책사업이니 감내하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농민을 향해 지역 이기주의라고 비난하는 그들이야 말로 최소한의 양심조차 없는 지역 이기주의자들이다. 탈핵희망버스는 단순히 농민들에게 돈 몇 푼 더 주자는 게 아니다. 경찰을 앞세운 폭압적인 정책에 맞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지키고, 서울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힘없는 농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왜곡된 에너지 정책을 바로잡기 위해 버스에 오른 것이다. 한전은 지난 주말 여론조사 결과를 내놨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송전탑 공사와 경찰 투입에 찬성했다는 것이다. 외부세력 개입에 대해서도 전국적으로 65.6%, 밀양은 67.2%가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한전은 이런 여론조사 결과를 내놓으면 외부세력이 힘을 잃어 공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한전이 70년대 사고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할 뿐이다. 이런 저급한 선전전은 '국책사업'이란 단어만 앞세우면 모든게 정당화됐던 권위주의 시대에서나 통했던 수법이다. 사태를 책임져야 할 당사자가 실시한 여론조사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 지 한 번만 생각해 보았다면 헛돈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상황 판단력이 이 지경이니, 송전탑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건 당연했다. 외부세력을 돌려보내고 싶다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힘없는 소수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왜곡된 에너지 정책을 바꿔야 한다는 그들의 지적을 이념적 잣대로 무작정 배척해선 안 된다. 탈핵희망버스를 불순세력이라 비난하기에 앞서 정부는 이번 사태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아야 한다. 국책사업이란 명분 아래 희생을 강요하는 정책은 국가적 폭력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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