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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9 23:00
살인의 나라, 묵인의 공동체.
조회 수 1296 추천 수 0 댓글 0
사람이 다치고 죽는 것은 통계적으로 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별 신경쓰지 않고 지나치는 일상에도 다른 어떤 공간에서는 수많은 폭력과 파렴치한 일들이 몇 초에 몇 건 씩 벌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무심할 수도 있나보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를 묻고 살아갈 수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내 이웃이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갔다면 이건 그저 그렇게 감상적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그건 바로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꼭 7년 동안 10여 명의 우리 젊은이들이 이 곳 남의 땅에서 목숨을 잃었다. 치사 사건만 이승준 씨와 이번 강태희 씨를 비롯하여 4건 5명, 자살 및 익사 사건으로 꼭 그만큼의 고귀한 생명들이 스러져 갔다. 우리가 흔히 듣는 표현인 인구 몇 만 명당 얼마라는 공식을 빌자면, 이러한 일들은 어찌 보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인양 싶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그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지켜보는 우리 바로 자신이다. 어찌 보면 한 사회를 요동치게 할 만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동안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지내왔던 가? 단지 안타까울 뿐이다라는 한 만디로 마음 속에서 지워버리려 노력하지는 않았던가? 작년 6월 남의 나라 남의 땅에 발붙이고 사는 우리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던 사건이 일어난 지 꼭 1년하고 2개월 만에 다시금 쓰린 가슴을 후벼파는 결정이 내려졌다. 한 사람을 주먹질하여 턱을 으스러 뜨렸을 뿐만 아니라 방치하여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한, 그것도 모자랐는 지 토막을 내어 냉장고에 보관하는 엽기적인 짓을 저지른 파렴치한을 영국 법원은 ‘의도성’이 없다는 말 한 마디로 교통사고나 마찬가지인 ‘과실치사’로 처리해 버렸다. 누군가는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문화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상의 힘 겨루기의 결과이다. 법정에 참석한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법원에 제출된 관련 증거들과 증인들 대부분은 가해자 측이었다고 한다. 검찰의 기소 내용만을 가부로 결정하는 미국의 배심원 제도와는 달리 좀 더 넓은 재량권을 가진 영국의 배심원 제도는 이러한 심리 과정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엄격한 절차주의 보다는 어느 정도 재량권이 시민에게 부여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굳이 미국에서 벌어졌던 OJ 심슨의 경우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법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그렇게 논리적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법이라는 제도 자체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여진 공식적 의사소통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적 장치들에 대한 한국인의 이해는 어느 정도일까? 결국 이러한 결정이 나오게 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한인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무관심, 무감각 때문이며, 또한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들의 미비에 있다. 앞에서 법적인 문제가 결국 의사소통의 문제라고 언급했듯이, 이번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공동체 안에서의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다. 그것은 다른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데 어쩔 때는 관심과 이웃 간의 정이라 불리기도 하고, 또는 책임의식이라 불리기도 한다. 결국 우리가 바로 내 옆의 이웃과 내 공동체에 관심과 대화를 나눌 때 우리 자신 역시 누군가에 의해 관심과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가 스스로 보호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어떤 공식적인 단체라는 이름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이웃간의 사적인 네트워크가 활발해 질 때 우리는 그걸 시스템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목이 빠져라 한인회만 바라보는 것은 안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생겨날 지도 모를 또 다른 피해자 역시 지금껏 잊어왔던 것처럼 잊혀져 갈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할 것은 그 사람이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15일 고 강태희씨 추모집회 및 조그마한 촛불집회가 열린다. 그 촛불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는 등불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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