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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예술칼럼
2023.07.04 14:04
만남 ; 이우환과 바넷 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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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저널 355 만남 ; 이우환과 바넷 뉴먼
1. 그림은 끝났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만남을 가진다. 우선 아침에 눈을 떠 천장에 돌아가는 팬을 만난다. 또 우유와 토스트를 아침 식사로 만나고,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만난다. 창 밖에 보이는 나무, 하늘, 이웃집과도 만난다. 이렇게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과 욕망으로 우리는 셀 수 없는 만남을 가진다. 이 중에서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만남도 있다. 예를 들자면, 고흐에게 고갱이, 피카소에게 세잔의 회고전이, 그리고 존 레논에게 오노 요꼬가 그렇다. 고흐나 피카소, 그리고 존 레논이 이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들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우환의 바넷 뉴먼 작품과의 만남도 또한 그렇다. 이것은 이우환에게 작가로서 중요한 전환기를 만들어주었다. 이우환은 “그림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1972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바넷 뉴먼의 블랙앤드화이트 회고전을 보고 쇼크를 받았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MoMA 바넷 뉴먼 개인전 전경
1971년 10월21일부터 1972년 1월10일 뉴욕 현대 미술관 (MoMA)에서 열린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의 전시를 보고 이우환은 그림의 출발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전시를 본 후 어릴 적부터 배운 점을 찍고 선을 긋는 서예 행위를 떠올렸고, 이때부터 그림을 통해 시간을 표현하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유명한 연작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우환 작품
이 작품은 점차 퇴색하는 색상 과정을 보여주면서 몸과 손이 움직이는 흔적을 따라 시간의 흐름을 전달하고 있다. 이 1970년대 초 ‘점으로부터’ 및 ‘선으로부터’ 시리즈 작품은 이제 밀리언 달러를 호가할만큼 비싸다.
그는 이러한 시리즈를 약 10년 동안 계속 그렸다.
Barnett Newman, First Station,1958, via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2. 반달리즘 이우환을 충격에 빠뜨린 바넷 뉴먼의 작품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1966년과 1968년 사이에 바넷 뉴먼은 모두 네 점으로 이루어진 연작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를 제작했다. 그런데 이 중 두 점이 반달리즘의 대상이 되었다. 반달리즘(vandalism), 즉 훼손 행위(毁損行爲)는 사전적 의미로는 공공의 재산이나 사유 재산을 고의적으로 또는 무지로 인해 파괴하거나 해를 끼치는 행위를 일컫는다. 특히, 문화·예술 및 공공 시설을 훼손, 파괴하거나 낙서로 더럽히는 활동을 말하는 단어다. 기후 위기에 대한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요즘 기후 활동가들은 주요 미술관에 전시된 유명 예술가들의 명화를 표적으로 삼고 있다. 기후 위기로 인류가 사라지고 난 뒤에는 예술 작품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명화 같은 예술품을 훼손하는 것이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렇게 기후활동가들이 고흐나 모네 등 유명한 명화에 자신의 손을 접착시키는 행위를 하는 것과 같이 누군가는 바넷 뉴먼의 작품에 칼질을 해댔다.
Banet Newman,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 1966
그중에서 세 번째 작품의 피해는 가장 컸다. 세 번이나 공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들은 저 텅 빈 화면에서 무엇을 느꼈길래 이런 짓을 한 것일까? 이 사건에 대해 ‘1900년 이후의 미술사’의 저자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런 재난이 그저 미친 사람의 소행으로 간과돼서는 안될 것이다. 뉴먼의 그림이 빈번한 반달리즘의 위험을 넘겨왔기에 더욱 그렇다. 이렇게 노골적인 우상파괴적 행위가 부분적으로는 그 작품 자체에 의해 부추겨진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3. 꿀먹은 벙어리 철학자 프랑수아 료타르는 뉴먼이 작품에서 구현하는 방식을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고 했다. ‘무엇가를 표현하기를 포기함으로써 뭔가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것, 즉 침묵의 표현으로, 그리고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주는 것을 통해 뉴먼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6-7m나 되는 자신의 대형 작품을 그는1m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감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그가 집중한 ‘숭고’라는 주제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숭고’가 도대체 무엇인가? ‘숭고’는 우리 모두의 내부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어떤 깨달음을 얻는 순간 느끼는 고귀한 감정이다. 즉, 우리를 ‘꿀먹은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바로 숭고미다. ‘숭고’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롱기누스(Gaius Cassius Longinus, BC 85- 42)에 의해 최초로 독립된 주제로 다루어졌고, 그가 말하는 숭고는 원래 ‘높이’라는 뜻이었다. 이후 ‘숭고함’은 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철학의 핵심 테마 중 하나였고 사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잊혀져 있었다. 숭고론의 한 획인 칸트는 우리를 말문이 막히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 숭고미라고 했다. 그래서 이것은 몰형식적이고 초감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헤르만 헤세 작품 ‘데미안’ 에서 제시된 성장기의 진통의 과정으로 마치 아프락싹스처럼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 얻게되는 정신적 영역과 비슷하다. 자신의 틀을 깨고 나오면 삶에 대한 신선한 충격을 받는 동시에 숭고함을 느끼게 된다. 이때 우리의 상상력도 확장된다. 즉, 감성적 직관을 초월하는 심의의 활동 능력에 숭고함의 본질이 놓여 있다. 바넷 뉴먼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우리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확장하여 감성 능력 한계 저 너머에서 좌절과 쾌감을 느끼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우리가 숭고함을 맛보기를 원했다.
바넷 뉴먼, Canto V, 1963-4 (사진출처: Tate)
작가와 작품, 작품과 관객이 느끼는 감정에는 교집합과 함께 독립적인 공간들이 있다. 그래서 바넷 뉴먼이 그리고자 했던 것과 관객이 느끼는 감정 사이에는 분명히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 수 있다. 수학공식같은 정확한 ‘숭고’라는 감정의 정답은 없다.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메일 : choijihye10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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