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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예술칼럼
2024.02.27 09:55
예술에서만큼은, 나는 킬러다! – 루이즈 부르주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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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저널 373 예술에서만큼은, 나는 킬러다! – 루이즈 부르주아1
1. 나는 킬러니까! “삶에서 나는 스스로를 희생자라고 본다. 그게 내가 예술을 하게 된 이유다. 내 예술에서만큼은, 나는 킬러니까.” 이것은 큰 거미 조각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는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가2008년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한 말이다. Louise Bourgeois, Maman, 1999, cast 2001 (사진출처: Guggenheim Museum)
그녀는 킬러가 되어 누구를 죽이고 싶었던 것일까? Louise Bourgeois, The Destruction of the Father, 1974 (사진출처:WikiArt)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작품, ‘아버지의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Father)’(1974)에서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동굴처럼 보이는 곳에 라텍스와 석고 등을 재료 삼아 천장에 거대한 유방들과 남근 형상의 조각들을 매달아 놓았다. 게다가 중앙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토막난 채 널브러진 조각들이 있다. 이것은 다름아닌 아버지의 절단된 사지다. 부르주아와 남동생, 그리고 언니까지 세 남매는 아버지의 팔다리를 찢고, 물어뜯고, 마침내 성공적으로 먹어버린다.
2. ‘이 남자는 바람을 필 것 같지 않아’ 그녀가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아버지를 토막내어 죽이는 것을 전제한 작업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은 부르주아가 자신의 남편 로버트 골드워터가 사망한 다음 해에 제작한 것이다. 1938년 27세에 미국인 미술사학자 로버트 골드워터(Robert Goldwater)와 결혼할 당시 부르주아는 ‘이 남자는 바람을 필 것 같지 않아’라고 말했다. 이렇게 바람을 피고 안 피는 것이 그녀에게 결혼을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했던 이유가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때문이었다. 그녀가 어렸을 때 부르주아는 아버지가 자신의 가정교사와 한 침실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는 자신의 외도를 부르주아에게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10여 년의 세월을 그녀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를 증오했고 반면에 어머니를 연민했다. 이런 가부장적이고 부조리한 아버지에 대한 저항은 그녀가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는데 원동력이 된다. 그런데, 사실 그녀의 전공은 예술이 아니었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더듬으며 삶에 대한 질문의 답을 루이스는 수학과 기하학에서 찾고자 했다.
“나는 아무도 바꿀 수 없는 규칙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만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 루이즈 부르주아 -
그래서 1930년 19세에 소르본에 입학했지만, 좀처럼 만족스러운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2년 그녀가 사랑하고 존경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때 부르주아는 큰 충격에 휩싸이고 이것을 벗어나는 하나의 돌파구로 그녀는 미술 공부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녀가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는데 또 다른 결정적인 이유는 아버지가 예술가를 경멸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부르주아의 초기 작품은 ‘아버지의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Father)’(1974)와 같이 충격적일 만큼 직설적이고, 공격적이며, 파괴적이고, 그리고 폭력적이거나 날 선 에로티시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살던 집 형태의 조각을 철창 안에 가두고는 단두대를 설치한다거나, 뱀이 똬리를 튼 듯 성기를 포함한 상체를 감싸 다리만 남은 조각을 매달았다. Louise Bourgeois, Seven in Bed, 2001 (사진출처:WikiArt) 이 작품에서와 같이 한 남자와 일곱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있는 식의 일련의 작업에서는 증오와 복수심, 그리고 방어적인 퇴행성까지 담았다. 그녀는 폴 가드너와의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집으로 온 가정 교사 세이디(Sadie)가 알고보니 아버지의 애인이었어요. 세이디는 우리집에 살았고, 아버지가 차를 운전하면 그녀가 조수석에 앉았죠. 엄마와 나는 뒷좌석에 앉았고, 나는 그런 엄마가 정말 싫었어요!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라도 아빠를 지켜봐야 그가 밖으로 돌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때때로 부르주아는 세이디나 아버지를 죽이는 상상을 했었다고 한다.
3. 예술은 정신적 외상의 경험이거나 재경험이다 예술을 통해 부르주아는 마침내 자신의 정체감을 형성할 수 있었고, 자신의 고통과 두려움을 일기를 쓰듯 작품에 쏟아냈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있어서 예술은 이런 심리적 압박의 고통을 거침없이 까발림으로써 그것을 완화하는 그리고, 부모와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에서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나아가 자신의 성장을 위한 도구였다.
“예술은 정신적 온전함을 보증하는 것이다. 예술은 정신적 외상의 경험이거나 재경험이다” – 루이즈 부르주아 –
1911년 12월 25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2010년 5월 31일 미국 뉴욕에서 심부전으로 죽을 때까지 그녀는 예술을 통해 자신을 찾아 헤매였고, 삶의 고통 속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애썼다.
4. 나는 내가 알고 경험한 것만 다룬다. Louise Bourgeois, Arch of Hysteria, 1993 (사진출처:Pinterest)
“내게 조각은 신체다. 내 몸이 곧 내 조각이다”라고 말하는 부르주아. 그런데, 그녀가 처음부터 조각을 한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는 에꼴드 보자르와 에꼴드 루부르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예술계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녀를 지켜보던 프랑스 예술가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 1881-1955)는 그녀의 조각에 있어서의 독특한 재능을 발견했고, 그녀에게 조각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후, 그녀는40대가 다 되어서야 미술가로 본격적으로 활동했고, 60대 때애 비로소 주류 미술계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부르주아는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과 반란의 욕망을 담은 조각 작품으로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자신이 페미니즘 작품만을 만드는 예술가는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Louise Bourgeois, Femme, 2006 (사진출처:MoMA)
“나는 내 작품을 어떤 ‘이즘’으로 묶는 것에 반대한다. 다만, 나는 내가 아는 것에 관해서만 얘기할 뿐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없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성’들을 위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 루이즈 부르주아 -
그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해 오고 있다고 강조하는 부르주아는 한 인터뷰에서 “내 모든 시간은 일종의 치유를 위해 바쳐진 기간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관심을 갖는 많은 것들은 성차별이라는 개념 이전에, 내가 경험한 고통, 고독, 상처, 증오, 연민 등을 통해 얻은 감정의 집합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렇다. 그녀는 솔직하게 그저 그녀가 알고 경험한 것만 다루었다.
5.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잔인함을 경험한다.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메일 : choijihye10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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