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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예술칼럼
2024.08.11 14:24
사막을 그리다 – 카지미르 말레비치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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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저널 389 사막을 그리다 – 카지미르 말레비치
내가 사막을 처음 만났던 곳은 캘리포니아에서였다. 그곳에 가기 전까지 나는 사막은 사하라 사막처럼 아무것도 없는 그저 모래로 가득한 곳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사막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 이상이었다. 그 곳에는 무한정한 소리의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사막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 중 하나가 ‘듄’인 것 같다.
프랑크 허버트(Frank Herbert)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 "듄 (Dune)1,2” 속의 대부분의 배경도 사막이다. 여기서 사막도 영화의 중요한 상징적 요소로 작용한다. 사막은 듄 행성에서 가장 주요한 자원인 멜랑저(머나니) 스파이스가 산출되는 장소다. 이 스파이스는 길티나스 혈통을 통해 예언된 예정자를 발견하고 제어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사막은 권력과 지배의 중심지가 된다. 사막은 탁월한 생존 기술과 지혜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극도로 가혹한 환경으로, 생존이 매우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사막은 주인공 폴 아트레이데스(Paul Atreides)가 자신의 운명과 역할을 깨닫고 자아를 찾는 과정에서 중요한 배경이 된다.
영화 듄2의 한 장면 (사진출처: hdqwalls)
세 번째로, 사막은 물리적인 도전 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내면적인 시련과 변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주인공 폴은 사막에서 자신의 능력과 운명을 깨닫고, 그의 인간적, 정신적 성장과 도전을 겪는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사막은 존재론적 상징 그 자체다. 그곳에서의 삶과 죽음, 인간의 한계와 용기, 그리고 자아 발견의 여정이 영화 속에서 깊이 있게 다루어진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또, 존재할 수도 없을 것 같은 황량한 사막이 영화 "듄"에서는 단순한 배경을 넘어서, 주제의 핵심과 주요 캐릭터들의 성장과정을 깊이 있게 반영하는 중요한 상징적 장소다.
이런 사막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사막에 흐르는 침묵, 그것은 무슨 색일까? 하얀색? 아니면 검은색?
카지미르 말레비치, 흰 바탕 위에 검은 정사각형 , 1915.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사진출처:한국경제)
이것은 단순한 외관을 넘어서 복잡한 사유와 상징주의적 내용을 담고 있는 절대주의의 창시자인 러시아 태생의 현대 미술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9-1935)의 검은 사각형이다. 말레비치는 이 그림과 함께 예술도 사막에서 헤매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에게 사막은 극한의 어려움과 절망으로 이끄는 상실의 어떤 곳이 아니라, 신의 초월성이 드러나는 장소였다. “중요한 것은 단지 감수성밖에 없다. 바로 이 길을 통해 예술, 즉 절대주의는 재현을 벗어난 순수 표현에 이르게 된다. 예술은 감각외에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는 사막에 도달한 것이다. 절대주의의 사각형 및 그 이념에서 생겨난 형태들은 원시인의 기호와도 비교될 수 있다.” - 말레비치 - 또한 말레비치는 물리적인 사막의 이미지를 초월하여 인간의 정신적 상태나 사회적 현실을 담아냈다. 그에게 사막은 현대 사회의 고립과 불확실성을 상징적으로 투영하는 곳이었다.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은 사라졌다. 우리는 사막에 있다…우리 앞에는 흰 배경에 검은 사각형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 말레비치 – 그의 작품은 우리가 사막에서 살고 있고 그곳에서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어왔던 이념이나 의지의 세계를 떠나 해방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것만이 삶의 실체라고 말하는 것 같다.
Kazimir Malevich, Black Square (2nd version), c.1923 (사진출처: WikiArt)
말레비치는 예술이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상주의, 야수주의, 그리고 입체주의까지도 대상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하면서, 재현할 대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회화는 회화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절대주의 이전의 모든 회화, 조각, 문학, 음악은 자연의 형태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대상을 재현한다는 의무를 지고 있는 예술을 해방시키고자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캔버스 위에 사각형만 남겨 놓았던 것이다. 말레비치의 이 정사각형은 무언가를 상징하거나 묘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네 변이 같고, 네 각이 같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형태로서 마침내 이것은 그의 유일한 조형 언어가 되었다. 그는 이번에는 반대편 극단으로 치달렸는데, 어둠 대신에 밝음을 가지고 실험하면서 검은 사각형 대신 ‘흰색 위의 흰색’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그때까지 자신이 내놓은 작품 중 가장 급진적인 작품이자 당시의 미술 분야에서 지축을 뒤흔든 작품 중 하나였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흰색위의 흰색, 1918 (사진출처: 네이버 포스트)
말레비치는 이렇게 무한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하얀 사각형 위에 하얀색 사각형이 겹쳐지는 작품 연작을 그렸다. 그에게 예술은 근본적으로 정신적인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현실과 유사성도 없고, 이상적인 이미지도 없으며, 물건도 없고, 맨몸을 드러낸 뼈밖에 없는 사막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곳 이 사막에서 이제 어떻게 달라질지 질문을 시작할 수 있다.” - 말레비치 –
Kazimir Malevich, The White Cross, c.1927 (사진출처: Arthive)
말레비치와 같이 우리도 맨몸을 드러낸 뼈밖에 없는 사막에서 우리의 삶을 위해 스스로 어떻게 달라질지 질문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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