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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의 프랑스이야기
2014.11.04 20:15
상식(common sense)이 만든 역사 - 독립과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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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common sense)이 만든 역사 - 독립과 혁명 미국 독립전쟁은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이라는 전직 영국 세무공무원의 소책자가 불을 지폈다. 1776년 1월의 이 책자의 제목은 “상식”이다. 인간이 자연법에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어처구니 없는 군주제에 종속된 노예 같은 출생을 가지고 인생을 불쌍하게 살아 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며 강도 같은 특권 계급의 위치를 누리는 귀족들의 힘에 눌려 살아간다는 것은 수치라는 점을 자각케 하였다. 그리고 거대한 미국이라는 나라가 조그만 섬나라에 종속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토마스 페인은 대서양을 건너와 미국에서 행운을 만나려는 시도는 성공하였다.
<사진:상식 1776년 판>
영국에서 신하된 백성이 미국의 시민으로 신분 상승되고 당시 최 단시간에 15만부가 팔린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다 물론 종교의 자유가 없는 청교도 국가에서 무신론자로 살다가 빈곤과 고독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삶을 마감하였지만 그는 최소한 지국상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중요한 인물이다. 물론 종교의 권능에 눌려 그의 이름이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잠시 자료를 뒤져보면 쉽게 발견되는 숨겨진 보석 같은 인물이었다.
<사진:미국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토마스 페인이 주장한 자연권은 천부적인 권리로 그 권리 안에는 생명, 자유, 소유가 있었다. 소유에 분쟁이 생기면 계약을 맺는다. 자연권 가운데 통치권은 위탁한 사람에게 주지만 양도된 권리가 아니라 통치가 잘못되면 되찾아 와야 한다. 소유권에 대한 항목은 독립선언서에 행복을 추구할 권리로 바꾸어
놓는다. 자유인으로 미국인들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그들 삶의 기본 원리다. 미국인들의 행복은 자유의지를 가진 시민들 개인이 쟁취한다. 자유의지를 가진 모든 인간은 스스로 만든 행복을 스스로 지켜
나간다.
<사진:자유의 여신상(바르똘디 작품> 상식이 만든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한 프랑스는 1763년 영국과 맺은 굴욕적인 파리 조약에 대한
보복을 꿈꾼다. 1778년 미국 13개 주의 독립전쟁에 참전하며
영국에 보복을 가하고 15년 전 파리 조약으로 잃었던
미 대륙의 영토 지분을 회복한 것도 좋았고, 영국에 대한 자존심을 회복한
것은 더욱 좋았다. 하지만 요크타운 Yorktown 전투 개입으로 절재 왕정의 국가 재정이 전쟁 비용으로 파탄이 나고
민주적이고 공화적인 정신이 프랑스 땅에 유입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손실로 기록되어야 한다.
<사진:요크타운 전투에서 로샹보장군과 워싱톤장군> 무역의 파트너로 영국일변도에서 프랑스로 넘어오며 교역이 증대하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영국이 교역의 우선권을 가져간다. 오로지 프랑스에는 해방된 독립국인 미국 시민의 감사만을 남기고 실질적인 이득이 없었다. 로샹보(Rochambeau)장군과 라파이에트(La Fayette)장군을 상징으로 하는 프랑스에
대한 감사는 파탄난 프랑스 국가 경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10년 후 프랑스 대혁명의 중요한
구실을 제공하게 된다.
미국
독립선언 후 13년이 지난 1789년 프랑스에서도 시민 혁명이 일어난다. 프랑스 시민은 미국시민과 좀 다르게 태어났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동시에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이
대서양 건너 편의 미국인들과 다른 점이다. 그리고 평등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뒤에 박애 정신을 들어 간다. 가족 같은 형제간의
우애를 공화국 정신에 집어 넣었다.
<사진:민중을 이끄는 자유( 드라크르와 작품)> 1789년5월5일 소집된 삼부회의는 7월9일 제헌국민의회로 개명한다. 900명의 의원들이 모일 때 아직은 마이크나 음향시설이 없을 때다. 당연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웅변가라면 젊고 목소리가 커야 한다. 이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자들이 바로 로베스삐에르나 당똥. 그리고 마라였다.
<사진:미라보> 국민회의는 8월4일 귀족과 성직자도 세금을 내겠다고 선언하며 봉건제도의 지배가 종식되었다. 8월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귀족 마르끼 드 라파이에트La Fayette가 제안한다. 드 라파이에뜨 장군은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했었고 혁명군이 장악한 국민군 사령관이었고 국민의회 부의장이었다. 1789년 당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였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1743-1826)의 도움으로 인권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만들게 된다. 여기에서 권리 선언문을 수정하고 가필하게 한 사람들은 시에스나 말루에등이 있는데 이들은 미국식 행복 추구권리는 개인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인데 반하여 프랑스의 경우 박애정신을 내세워 사회가 어려움에 처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볼떼르(Voltaire1694-1778)나 장 자끄 룻소(1712-1778)같은 계몽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인들은 우리 사회는 개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인권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만들게 하였다.
<사진:장 자끄 룻소> 무엇이 1789년의 초고속 시민 혁명을 가능케 한 것일까. .1789년 왕이 멋대로 소집하고 해산할 수 있는 삼부회의를 그
해 5월5일 소집하였고 같은 해 7월14일 바스티이 감옥이 부서지고 8월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발표되기 까지 110일간 프랑스의 혁명적 변화는 눈부신 속도감이었다. 사람들을 이렇게 서두르게 할 수 있었던 그 바탕에는 바로 같은 18세기 내내 프랑스 사회에 싹트고 있었던 계몽주의가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에게 인간의 이성은 모두에게 동등하다고 생각된다. 군주나 신하나 주인이나 노예나 남자나 여자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이성의 능력이 동등하다고 보는 관점은 나중에 평등 사상의 기본이 되고 혁명의 진도가 초고속이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계몽주의자들의 주장은 과학자들의 탁월한 성과가 뒷받침이 되었다. 과학적 발견이나 발전 앞에서 이성적인 인간을 왜곡하고 장님을 만들고 마리아 상 앞에 무릎 꿇게 만든 것은 미신이나 종교였다고 생각되어 혁명의 주동자들은 교회의 문을 닫고 한 때는 카톨릭의 상징인 노트르 담 대성당을 절대 이성의 신전으로 삼았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 여자와 노예와 흑인은 그리고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은 아직
인간도 시민도 아니었다. 그들이 시민이 되고 인간이 되기에는 또 다른 혁명들이 필요했다. 시민인 인간이
중심이 된 세상이 돌아 가고 있는 동안 세속의 권력이나 종교적 지배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신세계의 탐험가들에 의하여 검증된 세상에서 세상 끝이나 지구의 종말이나
신비의 세계는 없었다. 다만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 세계는 이제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적극적인 자세로 나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이성의 눈을
뜨고 혁명이 시작되었지만 입법의회는 왕의 권위를 인정했다. 1791년 6월21일 왕이 국외 탈출 시도 중 바렌느에서 발각되어 잡혀 오자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 7월17일의 권력이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시민들의 대표자격의 모임인 국민의회는
빠리 시민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시민들을 학살했다.
<사진:단두대에 오르는 루이 16세> 1792년4월20일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하며 개전을 선점하자 루이16세 왕도 프랑스의 패배를 예상하며 혁명군의 자멸을 기대하였다. 오랜 지구전으로 민중은 뭉쳤고 1792년8월10일 빠리 시민 봉기로 왕을 가두고 입법의회를 해산시키고 9월20일 국민공회를 소집한다.
켈레르만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혁명 군대는 베르덩 서부 발미에서 공병 장교 루제 드 릴 Rouget de
l'Isle 1760-1836이 작곡한 라 마르세이에즈 La Marseillaise를 부르며 저항하였고 승리하였다. 유럽 최강의 육군 프로이센 군대는 퇴각했다. 프로이센 군대에 참가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이곳에서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사진:조각가 프랑스와 뤼드의 작품으로 개선문에 조각된 프랑스의 애국가 라 마르쎄이예즈> <사진:바스티이 감옥 모형> 사계절 옥탑방에서 테오 bonjourbib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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