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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예술칼럼
2015.02.02 03:55
최지혜의 예술칼럼 (8) 내 이름은 찰스 사치다. 나는 예술에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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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찰스 사치다. 나는 예술에 미쳤다.' 미디어계의 앤디 워홀이라 불리는 찰스 사치(Charles Saatchi)는 새로운 현대 미술을 보여주는 사치 갤러리의 소유자이자, 이라크 유대인 출신의 영국 기업인으로 영국 438위의 광고 재벌이다.
"My Name is Charles Saatchi And I AM An Artholic"
그는 1943년 이라크 바그다드 출생으로 1947년 박해를 피해 영국 런던으로 이주해, 런던 북부의 대학을 다녔다. 당시 엘비스 프레슬리,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등의 미국 팝문화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1970년 동생 모리스 사치와 함께 광고 회사 사치 앤드 사치를 설립하고 1985년까지 세계 최대의 광고 회사로 키워냈으나 1995년 축출당하자 새로운 광고 회사 M & C 사치를 설립했다. M&C사치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회사의 경영권을 동생 모리스에게 넘긴 채, 1980년부터 현대 미술품들을
수집하기에 이른 찰스 사치는 신디 셔먼,앤디 워홀이나 도널드
저드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수집하여1985년 사치 갤러리를 설립했다. 1990년대부터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데미안 허스트, 사라 루카스, 채프먼 형제, 크리스 오필리, 개리 흄, 마크 퀸, 트레이시 에민와 같은 젊은 영국 작가들의 작품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그들의 후원자가 되어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미술 작품들을 수집한다. “사치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현대미술의 반항아, 데미안 허스트의
말이다. 1992년 사치는 Young British Artists (YBA) 라는 타이틀의 전시회을 통해 영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독보적인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당시 런던은
현대 예술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파리, 뉴욕, 베를린 등에
쏠려있던 예술의 흐름을 찰스가 바꿔놓았다. 1998년에는 데미안 허스트의 상어
한 마리가 통째로 설치되어 있는 작품인 '살아 있는 자가 상상할
수 없는 육체적 죽음(1991)을 시작으로 그야말로
영국 전체를 들썩이게 한 '센세이션(SENSATION)'전을 연다. 보수적인 로얄 아카데미에서 "관람객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이 있으며, 자녀 동반 여부는 부모의 판단에 맡긴다"를 전시회의 안내문으로 내걸만큼 영국미술계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후, YBA는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키며 YBA가 없는 미술계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말이 생겼다. YBA는 미국의 포스트팝과는
구분되는 일명 ‘브릿팝(Britpop)’이라 불리는 모든
양식과 매체, 주제를 가로지르는 다양성과
파격성으로, 매스미디어와 상품의
세계를 거침없이 드나들면서 성·폭력·마약 등에 이르는 주제들을 섭렵해왔다. 독립적이고 각기 뚜렷한 개성을 나타내며 새로운 개념미술을 선보이고 있는 YBA는 일본의 워홀이라
불리는 타카시 무라카미(Takashi Murakami), 인도의 수보드
굽타(Subod Gupta), 중국의 아이
웨이웨이(Ai Weiwei) 등 세계 각국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예술의 흐름을 만든 찰스 사치는 또한 미술 시장의 붐을 이끌었던 'specullector'(수집가(art collector)와 딜러(dealer/speculator)의 합성어)라는 신조어의
대명사로 새로운 예술 시장을 창조했다. 1990년대부터 사치는
그의 소장품들을 5년 정도의 주기로
팔아치우기 시작해, 2005년에는 'The Triumph of Painting' 전시회에서 피터 도익(Peter
Doig), 마틴 키펜베르거(Martin
Kippenberger) 등의 그림들을 전시한 지 몇 달 후 경매에 내놓았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굳혀진 사치의 입지가, 지금은 미국의
수많은 콜렉터들과 찰스사치 그 자신의 영향으로 생겨난 중국의 수많은 콜렉터들 등 많은
Specullector들 사이에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의 최근 전시회는 YBA의 또 다른 버전인 YSA
-Young Sculptural Artists- 였는데, 몇몇 작품은 뛰어났으나, 추상적이고 일반론적인 주제에 맞춰 전시작품을 급하게 준비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면서
전체적인 전시 준비가 너무 성급했었다는 평을 받았기도 했다. 또한 오늘날의 전시회들은 무엇보다 더욱 복잡하고 정교하게 주제와 연관된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데, 그의 전시회는
오히려 작품들의 설명이 장식적이고, 의미없는 단어의
나열이 많았다. 즉, 큐레이팅에서도
개선의 여지가 있다. 결국 그의 전시회는 더 이상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갤러리는 천문학적인
운영비용에 시달려, 그는 2010년 사치갤러리를
국가에 기부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분명 엄청난 규모의 컬렉션을 무상으로 기부하겠다는 매력적인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갤러리
운영비용을 결국 납세자들이 부담하게 될 것에 대한 영국예술위원회와 영국 문화부의 우려와 5곳의 영국 국영 미술관을 거느리고 있는 니콜라스 세로타(Serota) 관장과 사치와의
불화, 사치의 미적
취향에 대한 반감, YBA를 일으킨 업적에
대한 질투심 등 여러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사치는
기증 작품을 위한 별도 공익재단 설립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수많은 예술적 유행들이 생기고 사라진다. 수퍼 컬렉터의 시초이자
현대미술의 상징적인 인물로, 현대미술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치, 그의 제국도 이대로 끝나고 말 것인가?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가? 그의 대표적 광고를 보면 우리는 그의 전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피임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하기 위해 배가 부른 남성 사진 옆에 '당신이 임신한다고
해야 더 정신 차리겠습니까?(Would you be more careful if it was you
that got pregnant?)'라는 카피의 광고, 1978년 선거에서 보수당의 대처 후보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노동자(노동당)는 일하지 않는다.(Labour Isn't Working)'는 선거 캠페인.
임신한
남자(1970) 자신의 취향을 믿고
직관력을 따르는 사치의 저돌성을 잘 보여주는 광고다. 컬렉터는 개인적 수집
활동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활동을
수행하며, 문화에 대한 투자자로서
한 시대의 미술계를 이끄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사치의 미술 전략, 사치와 YBA, 사치와 영국미술 등을 살펴보는 것은 현대 미술의 한 단면적 전망으로도 중요한 일이다. 또한 예술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투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진정한 콜렉터는 자신의 삶을 문화 ․ 예술과 동일시한다. 현대 미술 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콜렉터의 한 사람으로서 20세기의 메디치라 불리는
사치, 그가 보여주는 정면
돌파식 괴짜같은 전략은 “내 삶이 예술이다”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예술적 행보, 그리고 그 향방, 이 퍼포먼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진진할 것이다.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블로그 : blog.daum.net/sam107 페이스북 : Art Consultant Jihy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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