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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의 프랑스이야기
2015.02.23 17:13
프랑스 예술 산책 : 정물화와 뤼벵 보쥉(Lubin BAUGIN) 1612-166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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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예술 산책 : 정물화와 뤼벵 보쥉(Lubin BAUGIN) 1612-1663 (1) “아직 살아 있는 삶” 인가 “죽은 자연”인가 정물화는 “조용한 삶”이라든지 “움직이지 않는 삶”이라고 불리다가 18세기 프랑스에서 죽은 자연(Nature Morte) 이라고 부르게 된다. 영어에서는 여전히 정물을 아직 살아 있는 삶(Still Life)이라고 부른다. 18세기에 들어와 정물은 완전한 예술의 한 장르로 독자적인 그림의 한 경향을 당당하게 자리하게 된다. 정물은 항상 그림의 배경으로 디테일한 부분을 장식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정물 자체로, 풍경자체로 회화는 생각할 수 없었다. 정물의 오브제 선택에 따라 정물화는 풍속화가 되기도 하고 성서회화가 되기도 한다. 특히 프랑스 북부의 홀란드나 벨기에 쪽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정물화가 17세기 초반 새로운 회화의 장르로 받아 들여 졌다. 홀랜드는 신대륙의 발견으로 대서양을 통한 교역이 늘어나고 새로운 해외 영토가 확장되어 물질적인 축복이 넘쳐나는 나라였다. 당시의 홀랜드 사회는 칼벵파 교회를 통하여 교회나 가정에서 구약 성경 공부의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자기들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자기들이 여호와와 약속을 맺은 새롭게 선택된 백성이며 자신들의 착한 처신이 구원의 성공에 이르게 될 거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깔벵파 설교자들은 과도한 물질주의로 홀랜드가 멸망할거라고 설교하였다. 정물은 일상의 친근한 오브제들을 투영시켜준다. 일상과 회화의 만남이다. 꽃이나 과일 생선 그릇 등 일상에서 깨질 수 있는 것들과 상하고 썩어질 것들을 예술 작품 속에서 영원히 살아 남게 만드는 일이다. 일상의 순간들이 영원한 정지 동작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19세기의 인상파의 찰나적인 빛의 인상이 남긴 자국들은 이미 17세기 정물화가들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순간의 생명을 잡아서 영원한 생명으로 만든다. 아직 살아있는 정물이 된다. 종교적으로는 정물화의 소재에서 일상에서 번뜩거리는 찰나적인 진리의 형상의 비유를 찾았다. 섬세하고 세밀한 붓질로 만들어진 작은 크기의 정물화 작품들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18세기 샤르뎅을 만나면서 정물이 진정 자기 자리를 잡았고 정물화가로서 샤르뎅은 루브르에 자기 아틀리에를 얻게 된다. 19세기의 에두아르 마네는 “여인을 그리는 것보다 냄비를 그리는 것이 쉽다”라고 하였다. 많은 비평가들이 너무 일상적이고 진부한 소재라고 헐뜯는 정물화였지만 렘브란트, 샤르뎅, 고야는 물론이고 모든 화가들은 정물을 그렸다. 정물이 예술성이라는 단어에 부응하고 그 전성기를 맞기 위하여는 19세기 후반의 세잔을 기다려야 했다. 세잔은 정물화가라기 보다 새로운 회화 예술의 얼굴과 방향을 제시한 새로운 시대의 화가였다. 세잔의 추종자들로는 20세기의 파블로 피카소나 앙리 마티스등이 있다. 정물화에 나타나는 오브제들 하나 하나는 우연히 그려지지 않는다. 화가는 하나 하나의 오브제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고 있다. 뤼벵 보쥉(Lubin BAUGIN) 1612-1663 보쥉의 예술 시기는 전반부의 정물화 그리고 중반부의 이태리의 영향권 그리고 후반부의엄정한 고전주의로 파리의 우아함을 보여준다. 간결한 구성과 순전하고 생동감 없는 조화는 루이13세 치하 신교도와 도덕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루이 13세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퐁텐블로의 예술정신에 영향을 받은 많은 작품을 남겼다. 라파엘을 공부했고 기도 레니의 지도를 받았다. 지방의 화가에게는 장르가 제한되고 파리의 화가들의 연합에는 들어 갈 수 없었다. 정물로 시작한 보쥉은 그의 삶이나 스승들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 동 시대인 지방 출신 르넹을 따라 보쥉은 셍제르멩 데 프레 교회에서 작품을 시작했고 이곳의 수석 화가가 된다. 1632년부터40년까지 로마를 여행하고 로마의 여인과 결혼하고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온다, 로마에서 코레쥬와 라파엘로의 영향을 받고 돌아온 보쥉은 작품의 경향이 바뀐다. 파리에 와서는 노트르담 다리에 거주한다. 1641년 왕의 화가 칭호를 획득한 보쥉은 종교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빠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작품이 남아 있다. 작은 목판에 유화를 그린다. 그의 전성기 40년대는 빠리 화가협회에 받아 들여지고 왕실 회화 조각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입성한다. 4 년 후 아카데미의 잦은 결석으로 제외 되기까지 스승의 지위로 왕의 일반 화가로 활동하였다.1663년 빠리의 쎙 쉴피스 성당에 묻힌다. 17세기의 화가들로 역사의 그늘 속으로 묻힌 화가들 가운데 20세기의 기획 전시로 되살아난 대표적인 화가가 정물화가 루이 보쥉이며 빛의 화가 조르쥬 드 라 뚜르이다. 장기판이 있는 정물(La Nature morte à l'échiquier,ou Les Cinq sens), 보쥉, 1631 목판유화 55x73 cm 루브르 박물관 “좋은 인물화를 그리는 것만큼 좋은 꽃 그림을 그리는 수고가 필요하다” –카라바지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다” 코헬레가 말했다. 전1,2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전1,9 사계절 옥탑방에서 테오 bonjourbib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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