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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의 프랑스이야기
2015.03.09 22:20
프랑스 예술 산책 : 풍경 속에 그려지는 신화와 성경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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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예술 산책 : 풍경 속에 그려지는 신화와 성경이야기 (1) 예술 속의 풍경이라는 단어는 회화나 데상으로 사진이나 설치 등의 다양한 예술로 풍경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풍경은 종교화에서 생명의 상징으로나 창조의 아름다운 완성으로 상징화되기도 하고 종교적인 명상의 분위기나 인생의 무상함과 자연의 영속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중세 교회에서 풍경은 신성함의 또 다른 표현이며 신의 창조의 세계에 대한 찬양이었다. 르네상스를 준비하는 예술가들은 중세의 아이콘의 바닥에 황금 빛을 풍경으로 바꾸어 놓는다. 인생이 도달할 수 없는 황금 빛 낙원대신에 보는 이들ㄹ로 하여금 막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주변 풍경을 그린다. 르네상스의 풍경은 이상화되고 유토피아로 표현된다. 종교개혁의 주 무대인 홀랜드 같은 프로테스탄트 국가들 가운데 풍경이 발달한 것은 당시의 개혁주의자들이 교회 안에 우상의 표현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개혁을 받아 들인 나라에서 예술가들의 선택은 풍속화나 초상화 풍경화였다. 예술의 세계가 종교화의 성스러움에서 세속적인 대중의 예술로 넘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서적인 인물과 성인이 중심이 되던 시대에서 풍경이 더 크게 자리하면서 성서의 주인공인 예수나 제자들은 풍경 속의 작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17세기부터 풍경은 대 성황을 이루기 시작하여 19세기의 인상파시대까지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고전적인 풍경화로 니꼴라 뿌쎙이나 아니발 카라치가 활동하였고 바또에 이르러 자연과 이상과 감각이 배합된 풍경이 나타난다. 사진을 대신하는 정확한 풍경을 그리는 화가들도 있었다. 나무의 품종까지 확인 할 수 있는 지리 백과 사전적 그림들은 18세기 백과 전서파의 영향으로 이루어 진다. 19세기 낭만주의 회화에서는 운치 있는 풍경과 고귀한 풍경들이 이국적인 풍경들이 등장한다. 이 새로운 풍경들은 사람들을 충동하여 여행을 가게 만든다. 풍경이 보여 준 장소를 찾아 간다. 바르비종의 예술가들이나 사실주의 예술가들은 화폭에 담긴 풍경에서 무언가 새로운 의미나 해석을 그리고 새로운 사회질서와 새로운 인간 관계들을 읽어 내게 만든다. 인상파의 시대에 이르면 화가들은 풍경 깊숙이 들어가 풍경자체 보다 빛과 색깔의 효과를 더 중요시 한다.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붓질의 흔들림이 매끈하던 화면처리를 대체한다. 그리고 빛과 색깔이 풍경보다 큰 자리를 차지할 때 구상이 지워지고 추상으로 남는다. 이제는 주어진 풍경이 아닌 예술가 개인이 만든 세계와 개인적인 친밀한 접촉이 필요하다.
니꼴라 뿌쌩(Nicolas Poussin,
1594 Andelys~1665 Rome),
노르망디 초입 세느 강변 마을 앙들리스에서 태어난 뿌쎙은 17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프랑스 고전주의 화가다. 1624년부터 이태리에서도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 1665년 11월19일 로마에서 죽기까지 역사화가로, 종교적인 구성과 신화적인 구성으로 인물화로, 풍경화로 역동적으로 걸작품들을 토해 냈다. 특히 그는 풍경에 성경이야기와 신화이야기를 적절히 배합하여 배치시키는 천재성은 서양 예술사에서 거의 독보적이다. 태어난 지 400년이 지난 지금도 프랑스 고전회화의 대가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작품 구성의 풍요로움과 표현의 아름다움으로 감동케하는 뿌쎙의 작품을 바라보는 것은 크나큰 행복이다. 뿌쎙은 과장된 바로크 풍의 건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시대의 유행을 그리지 않고 고대 로마의 건축을 그리고 있다. 당시 새로 건축되는 귀족들의 저택과
교회의 장식에 많은 예술가들의 참여가 절실하였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취향대로 골라서 작업장을 선택할 수 있었다. 빠리에서는 화가협회
같은 것이 일을 정형화 시키고 작업의 한계를 정해 주는 일을 로마에서는 화가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뿌쎙은 자기의 자유로운 작업 환경을 누리기 위하여 후원자의 저택에 머무는 기간도 줄였다. 1640년 프랑스의 국왕과 리쉬리외 재상이 빠리로 돌아 오라고 압력을 넣었을 때 뿌쎙은: “나는 형벌로 둘로 잘린 사람처럼 돌아 갈 것이다”라고 말한다. 프랑스는 내부의 혼란이 끝나고 경제가 안정되고 국가는 강력한 왕권국가로의 면모를 되 찾고 있었다. 돌아 온 뿌쎙은
루브르의 그랑드 갈르리의 프레스코를, 그리고 벽난로의 장식을 그리고 계단을 장식하고 수 많은 노동자들의 작업을 살피는 왕실의 최고
화가로서 대우를 받는다. 이 모든 것은 화가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으며 평생 기피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2년 후 뿌쎙은
프랑스를 떠난다. 로마에 돌아 온 뿌쎙은 다시 고대 흉상들로 가득 찬 작은 집에서 홀로 작업한다. 뿌쎙은 하인들도 없이 오로지 요리사의 딸로 자기의 건강을 살펴 주는 부인과 함께 단 둘이서 산다. 그는 당대 수 많은 동시대인들과는 반대로 결코 사회적 출세를 꿈 꾼 적이 없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렘브란트가 부르주와 사회에 들어가 잘 나가고 있었고 마드리드에서는 벨라스케즈가 궁정에 들어가려고 힘쓰고 있었다. 안트워프에서는 루벤스가 왕자처럼 살고 있었다. 뿌쎙은 로마의 작은 집에서 뿌쎙처럼 살고 있었다. 뿌쎙은 예술가의 명분에 순종하며 겸손을 이상으로 고전적인 단아함으로 자신의 삶에 충성을 다하며 홀로 예술혼을 태우며 혼신의 힘으로 작품을 대했다. 여름
또는 룻과 보아스(L'Été ou Ruth et Booz) 1.18m×1.6m, 1660~1664년경
이 작품은 사계절의 연작 중에
한 작품이다. 리쉴리외 추기경을 위하여 그린 그림이었다. 1665년 왕과의 즈드뽐 경기에서 져서 빼앗긴 25점의 작품중 뿌셍의 13작품 중 하나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 리쉴리외 관에 전시되어 있다. 봄은 성경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로
아침 풍경 안에 자연이 소생하는 모습을 그리고 여름은 정오의 태양이 작열할 때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로 추수를 그린다. 가을은 늦은 오후의 빛으로 포도를 수확하는 가나안 풍경이다. 겨울은 대 홍수 날 저녁의 황혼의 빛으로 그려진다. 뿌쎙은 사계절의 리듬과 하모니를 통하여 자연과 그 분위기를 통하여 성경의 이야기를 노래하듯 시를 쓰듯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듯이 그려나갔다. 사계절은 뿌쎙의 마지막 그림으로 쓴 유언장이다. 사계절을 바라보면 뿌쎙 회화의 모든 진수를 찾을 수 있다. 풍경자체는 진부한 회화의 장르일 수도 있지만 그 자연 속에 성경을 신화를 심어 넣는 화가의 재주는 독창적이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인물이나 풍경은 각기 자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무대에 올라온 인물들은 말 없이 자기 대사를 읊조리고 있다. 무언극의 무대이지만 관객들은 이야기의 시작과 결말을 알고 있다. 작품은 성경과 신화를 풍경 속에 적절하게 안배하고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 여름 »은 신화 속 대지의 신, 수확의 여신 케레스(Cérès-Detemer)를 이야기하고 있다. 넓은 밀밭인지 보리 밭은 여름의 추수를 시작하는 풍요로움의 상징이다. 대지의 신은 풍성한 수확을 약속하지만 모진 비바람에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벌레를 잡고 이마에 땀을 흘린 자들에게 대한 보상으로 수확을 준다. <다음호에 이어서> 사계절 옥탑방에서 테오 bonjourbib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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