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예술 산책 :
풍경 속에 그려지는 신화와 성경이야기 (2)
여름 또는 룻과 보아스(L'Été
ou Ruth et Booz) 1.18m×1.6m, 1660~1664년경
가난한 모압 여인 룻은 이방 여인으로 남편을 잃고 홀로 사는 시어머니를 따라 자신도 전혀 연고가 없는 남편의 조국으로 온 여인이다.
토지가 없는 가난한 다른 여인들처럼 시어머니를 부양하고 자신의 입에도 풀칠 하기 위하여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줍는 일에 참가하고자 한다. 마침 베들레헴에 큰 땅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의 밭에 가서 이삭을 주을 때 밭의 주인이 가난 한 이방 여인의 효성을 이미 듣고 감동하여 불쌍히 여겨
<내 딸아 이삭을 주으러 다른 밭에 가지 말라, 여기서 멀리 가지 말고 나의 여종들과 함께 있어라> 신2,8
한낮의 햇빛이 비추는 거대한 밀밭 풍경 가운데 농부들이 추수하고 있다 정오의 빛이 밀밭의 황금물결과 보아즈의 노란색 외투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오른편의 4두 마차는 보아즈의 부유함 혹은 태양신 아폴로 신의 수레를 통하여 농사에 필요한 태양의 선한 역할을 보여준다. 네 마리의 말이 4계절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전면 구도에 성경 룻기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효성 어린 미망인의 이야기를 알고 감동 받은 밭의 주인 보아스는 자기 땅에서 이삭을 줍게 한다.
율법이 이야기하는 사회 정의를 위하여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를 불쌍히 여기라는 조항을 문자 그대로 충성스럽게 행동으로 옮긴 의로운 사람이다.
음식을 먹을 때에 밭의 주인 보아스는 <이리 와서 빵을 먹어라 그리고 식초에 적시어 먹으라> 고 권한다. 룻은 <볶은 곡식을 주어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간직하였다.> 신2,14
유태인의 전통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 동생이 없다면 그 다음은 친척의 촌수대로 책임을 찾아 간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밭의 주인 보아스에게 은혜를 입고 온 며느리 룻에게 이야기 한다.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오늘 밤에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그가 눕는 곳에 들어 가서 거기 가서 누우라> 신3,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대답한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신3,5 과부 시어머니의 음성을 하늘의 음성으로 듣고 순종하는 과부 며느리의 효성이 여인의 대답에 묻어 난다.
먼 친척 보아스에게 차례가 왔을 때 책임을 미루지 않고 짐을 맡는다. 그 모압 땅에서 온 이방 여인을 자기의 아내로 맞아 들인다.
이방 여인이고 과부를 그리고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있는 여인을 부인으로 맞은 보아스라는 남성은 일반적인 상식의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죽은 남편의 아이가 되고 아이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무릎에서 놀게 된다.
하지만 보아스는 의로운 사람이다. 그 둘이 연합하여 아들이 태어나고 그 이름을 오베드(Obed)라 하고 그는 이새(Isaï)와 다윗(David)의 조상이 된다. 멀리는 예수의 조상이 된다.
중세의 주석에서는 보아스에게서 예수의 타입을 보았고 룻에게서 교회의 타입을 보았다..
보아스와 룻의 결합은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민족의 결합이다. 선택된 백성과 이방 백성의 국제결혼이다. 남과 여의 결합이며 신과 인간의 관계가 맺어 진다.
기근을 피하여 피난 갔던 백성이 다 잃고 피폐해져서 고향으로 돌아와, 은혜로 자기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여 안정을 찾아 가는 행복한 이야기다. 믿음으로 결합하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용감한 여인과 의로운 남자의 사랑의 하모니다. 두 사람의 결합은 교회와 크리스트의 연합이다.
풍경 속에 그려지는 신화 이야기 성경이야기
밀레(Jean François Millet, 1814~1875)
노르망디 지방 셰르부르(Cherbourg) 인근의 한 작은 마을에서 농부의 큰아들로 태어난 밀레는 양치기와 밭갈이의 농민의 삶으로 어린 시절을 시작한다. 21세에 땅을 곁에 두고 회화에 입문한다. 잠시 빠리의 국립예술학교에 담고 뽈 드라로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지만 고향 노르망디 지방 유지들의 초상화와 에로탁한 그림을 그리면서 전업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8세기 취향인 신화적 영감을 그리며 때로는 관능적인 누드를 그리기도 한다.
셰르부르 토마 앙리 박물관에 가면 당시 그렸던 초상화들을 볼 수 있다. 초상화로 데뷔하지만 고객들의 기호에 맞추지 못해 일찍 포기한다. 그리고는 화가 밀레는 자기 스스로에게 타이른다. "내가 비단 구두 신기를 포기하고 나막신을 신기로 하면 나는 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그림을 그린다. 그는 농민 화가다.
자신의 출신대로 농민을 그리면서 1848년부터는 농민 화가로 불린다. 1849년 파리에 콜레라가 돌자 그는 바르비종으로 내려온다.
이삭 줍는 여인들 (Les Glaneuses) 캔버스에 유화, 85.3c×111cm, 1857년 오르쎄 박물관
1849년부터 바르비종에 자리를 잡은 밀레의 이 〈이삭 줍는 여인들〉은 가난한 농촌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밀레는 인간들의 고통을 처절한 웅변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농민들에 대한 그의 표현은 전혀 거칠거나 반항적이지 않다. 밀레가 그린 농민은 가난한 운명에 익숙하고 길들여져 있고 순응하고 있다.
당대의 잘 나가는 다른 화가 줄 브르똥(Jules Breton)이나 바스띠앙 르 빠쥬(Bastien Lepage)가 그리는 농민의 삶은 고통스럽기 보다는 보기에 넉넉하고 유쾌한 느낌을 준다.
화면 전경에 묘사된 세 여인은 땅에 떨어진 이삭과 알곡을 줍고 있다. 세 여인 뒤로는 한창 수확을 하고 있는 농부들이 보인다. 먼지가 뿌연 들판에서 농민들이 수확을 하며 짚단을 묶고 쌓는 이 장면은 그림의 배경 속에 가려져 있고, 멀리 오른쪽 끝에는 추수와 이삭줍기를 감독하는 말을 탄 인물이 보인다. 그 앞에는 베어 낸 단을 마차에 싣고 있다. 열기를 뿜고 있는 하늘에는 새들이 버려진 알곡을 먹기 위해 떼 지어 날고 있는 모양이 검은 점들로 묻어나고 있다.
<다음 호에 이어서...>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에서 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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