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예술 산책 :
풍경속에 그려지는 신화와 성경 이야기 (3)
<전 호에 이어서 계속...>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 하냐”(마6,26) 하는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
이삭을 줍는 세 명의 여인의 운명과 하늘의 새들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세 여인은 저 농민의 축에도 끼지 못하고 농촌 일용 노동자도 못 되는 레미제라블한 인생들이다. 세상이 돌 보아주어야 할 과부들일 수도 있다. 공중의 나는 새들은 인간들의 움직임이 마치기를 기다린다. 버려진 알곡을 쪼아 먹기 위하여 가난한 여인들의 다음 순서를 노리고 줄 맞추어 하늘 무대에서 무용을 하고 있다.
여인들은 마치 부조처럼 배경으로부터 돌출되어 있다. 윤곽은 두터운 붓질로 여인들의 형상은 흐릿해 전혀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천천히 그리고 묵묵히 한 알 한 알 이삭을 줍고 있을 뿐이다. 열심히 작업 중인 여인들은 누구의 딸인지 누구의 아내인지 모르는 익명의 여인들로 여름 추수기의 아무 밀밭에서나 볼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이다. 여인들의 움직임을 강하게 대비시키는 것으로 내리 쪼이는 강렬한 햇빛이 있다. 마치 한 여인이 연속적으로 작업하고 있는 모습이 화면에 비치고 있는 듯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여인들의 허리 통증이 느껴지고, 밀짚으로 인해 살갗이 벗겨진 손가락, 햇볕에 그을린 얼굴과 손이 보인다.
'네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창 3,19) 라는 성경 구절에 충실하게, 땅의 노동에 바쳐진 인간에게 감동 받는다" 라고 화가는 고백하였다.
하지만 에덴에서 쫓겨난 이브가 돕는 베필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고 아담의 역할까지 나누어 감당하는 것도 또 하나의 감동이다.
세 여인에게서는 짐짓 고귀함마저 느껴진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밀레에게서 어떻게 해서든 노동자들의 열악한 조건과 자본가에 대한 반항을 읽으려고 했다.
발자끄(Balzac)의 작품 《농민들》에 그려진 삽화를 보더라도 19세기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농부는 멍청함과 성질이 못된 것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정작 밀레에게 농민과 농촌을 그리는 것은 자기 출신에 대한 자부심에 기인한다.
"나는 수사학적인 언어의 거짓보다 거친 언어의 진실을 사랑한다" 고 했고, "나는 촌의 농부 중에 농부다" 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들라크르와(Delacroix)는 "밀레는 농부이며 자신이 농부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다" 고 말한다.
빈센트 반 고호는 밀레의 판화를 처음 접하고 너무 성스러워 신발을 벗어야 한다고 고백하였다. 밀레는 반 고호의 영원한 멘토였다. 빈센트의 글에 밀레는 렘브란트나 드라크르와와 동금으로 간주되며 현대 회화는 밀레로 인하여 그 지평이 열렸다고 주장한다. 반고호는 자신의 작품들이 세상의 모든 화가들의 작품 가격보다 높아질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도미에(Daumier)가 본 농촌 사람들은 사람보다는 차라리 짐승을 닮았다. 그러나 밀레는 그때까지 종교적 주제에 머물렀던 자신의 예술적 구도에 농촌의 작업들을 겹쳐 놓는다.
당시 좌,우의 논쟁에서 밀레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에서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보다 사회주의적이라고 불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면이다. 나는 결코 누구를 위한 변명이나 옹호할 생각은 없다."
1857년 살롱전에 출품된 이 작품을 두고 우파에서는 이 세 명의 여인들을 혁명의 허수아비라고 몰아붙였고, 좌파에서는 제도의 희생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밀레의 <이삭줍기>는 그리스 신화의 파르카" (탄생 Clotho, 수명 Lachesis, 죽음 Altropos을 일컫는 세 자매신) 또는 "누더기를 걸친 허수아비" 로 평가되며 스캔들을 일으켰다.
이삭을 줍는 여인들의 이야기는 성경이 그 원전을 제시한다.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 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신23,25
성경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할 의무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문인 발자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허용된 이 권리의 남용을 비난하며 그 권리를 없애야 한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판단했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선언 이후, 사회주의 계급의식이 미술계에도 침입한 양상을 보여 준다.
장 프랑스와 밀레의 농민들은 땅에서 고귀한 땀을 흘리는 전사들이다 그들은 산업혁명을 모른다. 농업 생산품은 산업 혁명으로 생산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 대는 비누나 향수처럼 수 십배, 수 백배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농산품은 농민의 땀 방울 만큼 생산해 줄 뿐이다. 시장의 요구가 넘쳐난다고 마구 생산할 수 있는 상품이라면 더 이상 농산품이 아니다.
밀레의 농민들은 고귀하고 장엄하다. 그들은 다른 농민화가들의 주인공들처럼 곱게 화장하지 않는다. 포동포동하지도 않고 하얀 피부를 자랑하지도 않는다.
내가 햇볕에 쬐어서 피부가 좀 검다고 흘겨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 지기로 삼았음이라. 아1,6
추수하는 농민들 49x96 cm 베지색 종이위에 파스텔과 수채화 검은 크레용
같은 주제의 작품이 니꼴라 뿌쌩의 〈여름〉이라는 제목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있지만 뿌쌩은 성서를 배경으로 한 자연과 풍경에 주안점을 두고 그렸다.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에서 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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