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예술 산책 :
부활. 죽지 않는 사람들 (2)
<전호에 이어서 계속...>
부활의 아침에 예수의 무덤으로 달려 가는 제자 요한과 베드로
(Les disciples Pierre et Jean courant au sépulcre le matin de la Résurrection.) 1898 Dim; H:82 cm X L:134 cm
이 그림은 무덤에서 시신이 사라졌다는 해괴한 이야기에 놀래서 무덤으로 달려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담았다. 이들은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실 것이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요한20장9절
오르쎄 박물관 2층 메자닌 층의 자연주의 화가들의 방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 이 그림은 처음에 마주 할 때 그다지 명화라는 느낌이나 대작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어렸을 때 극장의 간판 그리는 화실에서 볼 수 있는 광고판 그림의 주인공 초상화들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두 사람의 내력을 알아 보고 그들이 예수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파악한 후에 한참을 그림과 마주하다가 이상한 그림에 이상하게 빠져들고 있었다.
그림의 노란색 배경 전원 풍경은 일반 풍경화에세 보지 못하던 새로운 도전이다. 파아란 하늘이나 황혼의 아름다운 색깔은 보았지만 노란색은 또 색다른 느낌이다. 아마 황금색과 가까운 색으로 성화의 뒤에 성인들의 후광을 묘사하던 이 색깔을 전체 화폭에 풀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하늘의 수상한 색감으로 혼돈 스러운데 달려가는 두 사나이의 절박한 표정, 한 사나이의 투박스럽고 거친손을 모으고 달리는 표정에는 묘한 기대와 회한과 슬픔이 느껴진다. 옆에 함께 달리는 젊은 청년의 표정에는 간절함이 묻어 나며 꽉 움켜쥔 기도하는 듣한 두 손은 새로운 희망을 보여 주고 있다. 달리는 두 사나이의 생각에 사로잡힌 시선의 강렬함 과 허둥대며 달려가는 두 사나이의 모습은 애절하고 절박하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 일상에서 예수의 두 제자에 대한 대화는 전혀 다른 인상을 남겼다.
며칠 전에 십자가에 돌아 가신 예수를 무덤에 두고, 달리 세상의 길을 찾던 제자에게 그리고 ㅇ수가 미리 예언했던 것처럼 예수를 저주하며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했던 제자에게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황당한 소식을 상당한 회의와 회한으로 그리고 엄청난 불안과 초조감으로 쫓기듯 그리고 일말의 기대감으로 달려 가고 있다.
곁에 함께 달리는 요한은 예수의 가장 믿음직 스러운 제자였다. 차분한 성격에 말 없이 예수의 뒤를 따르는 요한에게 예수는 자기가 죽은 후에 엄마 마리아를 부탁한다고 당부했었다. 그의 얼굴과 굳게 잡은 손은 예수를 향한 열망을 잘 드러내고 있다.
스승의 부활 같은 사건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제자들이 시신 실종 사건 같은 해괴한 일에 당황하여 빈 무덤을 찾아 광야를 달리는 모습에서 나는 방향 모르고 목적 없는 내 인생의 달리기를 돌이켜 본다. 죽음의 의미를 모르기 대문에 삶의 의미도 모르고 밤 낮 없이 달리는 내 인생의 피곤한 달리기를 보고 있었다.
화가 으젠 뷔흐낭을 이 작품 이외의 다른 곳에서 만난 적이 없다. 새로운 예술로 인상파나 야수파 그리고 입체파들의 새로운 조류에 한눈 팔지 않고 제도권 명문 보자르를 나온 수재답게 그는 시대에 호응하는 그림을 그렸다. 당대에 많은 명성을 누리고 지금은 그리 유명하지도 않고 오히려 19세기말에 20 세기에 아직 성화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산업의 속도가 모든 인간들의 상상을 벗어날 정도로 빨리 지나가는 시대에 노란 풍경의 들판을 달리는 이 두 사람을 보면서 이 그림을 통하여 나는 목적 없이, 방향 없이 달리는 나를 다시 한 번 살펴 보게 된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1606-1669
신대륙을 발견하고 지중해 시대에서 대서양 시대가 열렸을 때 17세기는 홀랜드의 황금시기였다. 로테르담 항구,암스테르담 항구등은 교역의 중심으로 상업과 수공업들이 발전하고 더불어 인문주의 학자들의 학문적 성취가 두드러지고 일반 시민들의 예술적 취향까지 경제적 부흥과 함께 한다.
이 황금의 시대를 살면서 렘브란트는 외부적인 성공도 누려 보았지만 평생 백여점의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그리고 자존감을 잃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아름다움이나 부유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작품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인간에 대한 사람이 녹아 있다. 그림의 기법에서 흔히 말하는 명과 암을 이용하여 강렬한 인상을 주고 시건을 집중시키기는 하지만 그의 그림에는 그의 인물들 안에는 항상 인간이 지녀야 할 영성을 잘 담아내고 있다. 아름다운 인간 보다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얼굴에 새겨진 주름을 지우지 않고 그 주름에서 성숙한 인간의 내면을 그려내려고 힘썼다. 그는 일상의 이야기를 그리고 성경과 신화와 역사를 화폭에 담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신의 일생을 자화상으로 일기를 써내려 가듯 남겨 놓았다.
부엠마오의 순례자들(les pèlerins d’emmaus) 1648년 목판에 유화 68*65cm 루브르
누가 24장 마가 16장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 당한 지 얼마 후 제자 둘이 엠마오로 길을 가고 있었다. 그들은 길에서 골고다의 예수 처형 사실을 모르는 행인을 만난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가 예수인 줄을 모른다. 엠마오에 거의 다다른 곳에서 하룻밤 묵기로 하고 저녁 식탁에 둘러 앉았다.
예수가 빵을 떼는 순간 제자들은 눈이 열리고 부활한 예수를 알아 보았다. 동시에 예수가 사라진다.
<다음호에 이어서 계속..>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에서 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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