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혜 예술칼럼 (35)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1
잠 못이루는 열대야
“낮 최고 기온 37도입니다.” 한국의 낮과 밤의 뜨거운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결국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올해 처음으로 발생했다. 7월 30일 질병관리본부는 “지난 5월 24월부터 이달 28일까지 총 352명의 온열질환자(열사병·열탈진·열경련 등)가 발생했고, 28일에는 폭염으로 30대 남성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기상청은 “당분간 남쪽에서 무더운 공기가 유입되면서 전국 대부분 지역의 낮 최고기온이 30도 이상 오르고, 밤 기온도 25도 이상 유지되는 열대야 현상이 나타나는 곳이 많을 것으로 예상돼 야외 활동과 건강관리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옛부터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런 불볕 더위를 피해왔다. 양반들은 뱃놀이를, 평민들은 냇가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특히, 나이든 양반들은 방에서 계곡이나 폭포가 그려진 산수화를 보며 누워서 유람(와유(臥遊))을 했다.
요즘은 열기를 식히기 위해 워터파크나 바다를 찾는 경우가 많다. 최근 삼면의 많은 해변에는 수많은 인파로 넘쳐난다. 한국의 하와이라 불리는 제주도 같은 경우에는 비행기나 숙소를 예약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와유하러 떠나요, 제주도로
복잡한 교통체증없이 옛 어른들이 그랬듯이 시원한 바다를 연상시키는 제주도 풍경을 들여다 보며 와유를 즐기러 떠나보자.
게와 물고기가 있는 가족(은지화), 이중섭, 1950년대
두 아들이 바닷가에서 게를 잡으며 놀고 있고, 그 광경을 아내와 함께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는 아버지 모습, 제주도 서귀포시 자구리 해안의 풍경이다. 그림 왼편에 보이는 것이 섶섬이고 오른편이 문섬인데 실제로는 두 섬이 그렇게 가깝지는 않고, 섶섬이 저멀리 아스라이 보일 뿐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화가 이중섭은 두 섬을 사이좋게 붙여놓았다.
자구리 해안
이중섭이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게를 잡으며 놀곤 했다는 자구리 해안에는 화가가 서귀포 시절 가족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그리운 제주도 풍경’(1954)을 담은 표지판이 있다.
그리운 제주도 풍경, 이중섭, 1954
서귀포 피난 시절 이후 이중섭이 유독 게 그림을 많이 그린 이유에 대해, “게를 너무 많이 잡아먹었던 것이 미안해서”라고 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변변한 한 끼의 식사조차 하기 어려웠던 피난 시절, 이중섭은 근처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아다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고 한다. 가난한 화가의 가족에게 바닷게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단백질 보충원이었다.
이중섭의 아내 야마모토(한국이름 :이남덕)씨는 “힘들었지만 함께 있어 행복했다”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먹을 게 없어 바다로 나가 게와 조개를 잡아먹었다. 담뱃갑 속 은박지에 아들 태현 태성과 노니는 바닷게의 모습을 담은 그림은 그렇게 태어났다.”
이중섭의 삶, 처절한 가난
1916년 평안남도에서2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한 이중섭은 식민지,해방,전쟁,분단이라는 시대의 비극을 겪으며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견뎌야 했다.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홀로 창작에 전념했던 화가 이중섭은, 서귀포 피난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외로움과 싸우곤 했 다.
이중섭
그의 가족은 한국전쟁 당시 서귀포시 변두리 마을 이장 집에서 1년 동안 셋방살이를 했다. 이중섭 미술관 바로 밑에 그 초가가 보존되어 있다.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했을 만큼 가난했던 그는 4인 가족이 발은 뻗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작은 4.3m²(약 1.3평) 골방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었다.
이중섭이 1년간 살았던 초가
이중섭이 1년간 살았던 초가 내 거주했던 방
흔히 이렇게 이중섭을 ‘지독한 가난’과 함께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중섭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인식은 어느 면에서는 잘못된 것이다. 해방 후 이중섭이 세상을 떠나는 1956년까지 줄곧 생활고에 힘겨워 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고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 전반을 펼쳐 놓고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중섭은 평원군 일대의 부농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인생 40년 가운데 적어도 30년 이상 동안은 남부럽지 않게 풍족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 이중섭 집안의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45년 한반도가 해방의 환희에 들떠있던 시기, 그리고 이중섭의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중섭은 사업가 기질이 탁월한 그의 형이 집안의 재산을 잘 물려받아 그것을 더욱 키워왔던 덕에 서른이 되도록 집안에서 한 번도 돈을 버는 역할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으로 유학도 떠났고, 일본에서는 오히려 다른 한국인 친구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기도 하면서 살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중섭이 결혼하기 전까지 인생 여정에서 집안의 덕을 꽤나 보면서 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해방 후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 이중섭의 집안은 38선 이북의 원산에 있었다. 북한에서 이중섭의 형 중석은 공산주의 체제 아래, 하루 아침에 ‘인민의 적’이 되어 추악한 부르주아지라 불리며 악질 지주계급,악질 친일파의 혐의를 쓰고 원산 내무서에 수감된 후 처형되었다.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었던 형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자, 살림살이는 점차 궁핍해져 갔고, 몇 해 지나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아내 남덕과 두 아들, 그리고 죽은 형의 장남인 조카 영진과 함께 이중섭은 한 겨울 원산 부두에서 부산을 향하는 배에 몸을 실은 채 피난민이 되었다. 이 때부터 이중섭의 가난과의 처절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이중섭의 외로움, 그리움
(다음편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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