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예술산책 : 살인의 시대, 혁명의 바람이 피 바람으로.. (2)
하나의 역사 가운데 두 명의 살인자 그리고 두 명의 순교자
마라의 죽음과 샤를롯트 꼬르데(뽈 보드리Paul Baudry (1828-1886),1860년
캔버스에 유화,230 x 154 cm. 낭트 박물관.
여인은 치마 속에 감춘 칼을 꺼내 마라의 가슴에 손잡이까지 깊숙이 찔러 넣었다. 언쟁 소리에 측근들이 뛰어가 창가에 서서 두려움에 굳어 창백해진 샤를롯트를 발견했다.
1861년의 화가 보드리가 출품한 마라와 샤를롯트의 그림은 1793년 다비드가 숨기고 싶었던 장면을 공화국 역사학자 쥴 미쉴레 Jules Michelet 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고 그렸다. 공화국 시절의 영웅이 마라였다면 지금 이 장면의 그려진 영웅은 샤를롯트 꼬르데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실물 크기로 이야기가 실감나게 전달된다. 목욕탕에 입을 벌린 채 죽은 마라의 가슴에는 아직도 칼이 꽂혀 있다. 목욕탕은 작은 사무실을 겸하고 있다. 마라는 목욕탕에서 집무해야 할 정도로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구도는 오른쪽 위에서 왼편아래로 대각선으로 화폭을 가르며 내려 간다. 전체적인 어질러진 방안 풍경은 부부 싸움 끝에 실수로 무참한 결론에 이른 장면이다.
권위의 상징인 의자는 넘어 지고 마라도 한 시대의 무질서의 상징으로 타도의 대상이다. 산업혁명이 만들어내는 무질서로 점점 신음하는 민중의 산업근대화를 '마라의 죽음'으로 고발하는 것 같기도 하고 19세기를 바라 보는 시각도 다양해 진다. 한 폭의 역사화에서 자유 평등 박애의 대상에서 제외된 한 여인이 남용된 자유와 평등의 가슴에 칼을 찌르는 대상을 생각해 보며 시대를 생각한다.
18세기말의 혁명이 단두대로 보낸 여인의 실체가 70년 후 제2제정에 부활했다는 것도 새로운 의미를 찾아 보아야 할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 이르게 하는 생각의 틀을 다시 돌아 보아야 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발전이나 진보나 혁명이 사람의 희생을 전제되어야 한다면 그런 발전이나 진보나 혁명은 그 자리에서 멈추어야 한다.
그 누구의 이름으로라도 타인의 피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
역사적 사건이 예술가의 치정 사건으로
그려지다.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종의 병이며, 도취다.
그 병은 벗어나고 싶지 않은 병이고,
그 도취는 내게 필요한 도취다.
<에드바르트 뭉크>
노르웨이표현주의 화가이며 판화가인 에드바르트 뭉크는 의사 아버지를 둔 덕분인지 어린 시절부터 병과 죽음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면서 우울과 죽음, 질투, 애수, 광기,등 평생 어두운 일상의 내면적 주제에 몰두한다. 다섯 살에 어머니가, 열 네 살 때는 한 살 위 누나가 죽었다. 소년시절에 가족과 영원한 이별은 화가의 일생에 작품을 통하여 흔적을 남긴다.
의사나 엔지니어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리고 1879년 오슬로(옛 명칭:크리스티아냐) 공과대학에 입학 얼마 후 오슬로 미술공예학과로 전과했다. 여기에서 노르웨이 자연주의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를 스승으로 지도 받으며 프랑스 인상주의를 만난다.
1885년 빠리를 여행에서 폴 고갱,뚤루즈 로트렉등의 후기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봄날의 칼 요한 거리'(1891)나, '저녁때의 칼 요한 거리'(1892) 같은 작품을 남겼다.
뭉크는 이 시절 사회적 관습과 예술에 대해 보헤미안적 개방성을 가진 작가 헨릭 입센,,시인 스테판 말라르메 등 문인들과의 교류하며 예술 세계의 폭을 넓혀 나간다.
1889년에는 크리스티아나에서 큰 전시회를 열어 주었고 국가는 뭉크에게 예술가 장학금 3년을 제공하였다. 빠리에서 그는 레옹 보나의 제자로 작업 하였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충동은 도시가 제공하는 예술적인 삶이었다. 후기 인상파 시절을 맞은 빠리에서 반자연주의자들과 교류하며 화폭을 넓혀 나간다. 뭉크를 해방시켜준 것은 바로 이 빠리의 해방구였다. '사진기는 붓과 빨레트와 경쟁할 수가 없지, 사진기로 천국과 지옥을 찍어 댈 수는 없다니까'
뭉크에게 관심은 눈에 보이는 인상이 아니고 영혼이 바라 보는 인상이었다.
표현주의 선구자라고도 불리는 뭉크는 30대에 들어서는 보다 넓은 영역을 만나러 19세기 말의 조국을 떠나 베를린으로 건너가 독일 표현주의자들과 만나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1892년 독일 미술계로부터 초청받아 개최된 베를린 개인 전시회에서 야유와 호평을 동시에 받으며 새로운 시도에 대한 미지근한 반응을 받으며 새로운 예술적 시도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절규' '생명의 춤' '죽음의 소녀' 등의 작품을 통하여 인간 내면의 불안과 공포감를 묘사하며 이 불안과 공포에서 탈출을 꿈꾸었던 화가는 상징주의파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력을 미친다.
뭉크에게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죽음의 사선을 넘나드는 일이었다. 우리는 뭉크를 통해 한 개인의 우울을 발견하지만 더 나아가 그가 살았던 세기 말의 시대적 우울감도 추출해 낼 수 있었다. 그 어떤 개인도 자신의 시대와 동떨어져 살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가 그의 그림 구석구석들에서 거장의 솜씨로 재현된 것이었다.
목욕탕에서 나와 침실에서 살해된 마라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마라의 죽음1,La Mort de Marat I
, 1907. 캔버스 유화,150 x 200 cm. 오슬로 뭉크미술관 소장
마라의 죽음 II La Mort de Marat II, 1907. 캔버스 유화, 153 x 149 cm . 오슬로 뭉크미술관 소장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이 나를 강하게 한다'는 에드바르트는 니이체의 언어를, 니이체Nietzsche를 읽었다. 독서를 통하여 오랫동안 평가절하된 작품의 감동과 환상을 나눈다. 뭉크는 만나 보지도 못한 니이체의 초상을 그렸다.
새로운 살인녀 ?
사실과 허구가 어울러진 화가와 그의 연인 튤라 라르센 Tulla Larsen 과의 만남, 격정,불안,초조,충동, 결별은 샤를롯트 꼬르데에 의한 마라의 살인으로 형이상학화 된다.
마라의 죽음은 빠리 독립 작가전에서 브라크,드렝,루오등과 함께 전시되었다. 1908년의 예술계는 그랬다 이들은 비평가들로부터 '쓰레기 중대'로 취급 받았고 이미 고갱도 떠났고 이제 막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다.
뭉크는 바르느문드(Warnemünde)로 돌아 갔다. 뭉크는 '나를 술마시게 하는 바르느문드 거리가 좋았다'고 회상한다.
샤를롯트 꼬르데는 칼을 가지고 욕조 물 밖으로 나왔다. 튤라 라르센은 초록 빛 범죄의 방 한 가운데 화석처럼 기둥이 되어 굳어져 있다.
'나는 화폭을 다시 잡았다. 알몸의 남자와 여자를 다시 배치했다. 그의 오른손이 그에게 그의 왼손이 그녀에게 서로 접촉한다. 그리고 피가 흐른다. 이불은 상처의 피로 굳어 있다. 테이블을 덮고 있는 식탁보는 붉은 팔레트로 변한다. 그녀 뒤의 벽은 녹색 팔레트가 된다. 그의 아래 이부자리는 붉은 색이 아니고 녹색이다. 성스러운 혼란이 화폭을 지배한다.
꼿꼿이 서서 화석이 된 여인의 수직은 피 흘리며 쓰러진 남자의 수평과 겹쳐진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살아 있는 자들보다 죽은 자들을 더 많이 알게 된다.' 일찍 어머니를 그리고 누나를 잃은 에드바르트에게는 이 문장은 너무 절실하게 그의 인생을 지배하게 된다.
살인의 시도가 있었고 희생자가 있었다. 뭉크는 다시 또 하나의 살인을 그린다. 자신이 살해당하는 그림을 그리고 피를 흘리며 그려야 한다.
회화는 그의 살에 꽂힌 가시다. 그는 여전히 고통 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뭉크는 녹색의 배경에서 피가 방울처럼 떨어지는 가운데 자기를 보고 있다. 이제는 조용히 자기가 쓰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인은 자기의 마음 대신 칼을 바친거다.
침대에 누운 마라는 아직 편지를 받지 못하였지만 마라가 된 뭉크는 구원의 몸짓을 받았다. 회복 과 구원은 그림에서 온다.
뭉크가 마라의 죽음을 그릴 때 화가는 여러 가지 우울 증상에서 회복되어 아틀리에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아틀리에라는 단어는 고대 프랑스에 아스텔 'astelle' 에서 온다 아스텔은 라틴어 스텔라"stella"에서 온다. 별 étoile 이다. 아틀리에는 무수한 번쩍임이 넘치는 장소다.
뭉크가 브럿셀의 미술관에서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을 보고 9년 동안 머리 속에서 구상한 작품이다.
'작가의 머리 속에 화가는 스스로 관객처럼 스스로를 그려 나간다. 독자의 머리 속에서는 이미 화가인 것처럼 관객을 그린다.' 뭉크는 미쉘 뷰토르(Michel Butor)가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을 보고 글로 적어 낸 것을 몇 번이나 읽어 가며 머리에 새겼다.
나 뭉크는 '자연을 가로 질러 끝 없이 긴 외침처럼' 울리는 책에서 나오는 말들을 듣고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에드바르트와 튤라(Edvard et Tulla)의 필연적인 만남과 결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들었다.
1907년의 에드바르 뭉크는 마라의 죽음을 캔버스에 옮긴다. 애매한 구석이 없는 공간 구성을 보여 준다. 남자는 침대 위에 가로로 누워있다. 여인은 곁에 세로로 서있다. 두 인물이 만들어 놓은 두 개의 선이 화폭을 중간에 가르고 있다. 두 사람의 알몸은 서로 닿지 않는다. 한 인물은 죽음으로 고정되어 있고 다른 인물로 생명으로 고정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이 보여준 살인의 초상에서 뭉크는 자신과 연인의 관계를 발견하였다. 뭉크는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을 보고 자기의 연인 튤라의 집념이 자신을 죽이는 모습을 연상하며 역사의 우연적인 사건이 한 세기 지나 어떤 화가에게는 예언적인 메시지로, 필연으로 받아 들여 지고 있었다.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분명 사건에는 범인이 있었고 범인은 여인이었고 그 여인을 뭉크는 자기의 연인 튤라에게서 보았다.
혁명의 지도 영웅 마라가 왜 젊은 미모의 여인을 알몸으로 목욕하고 있는 욕실로 받아 들였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한다.
남녀 간의 관계에서 방안에서 벌어 지는 모든 상황은 두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에서 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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