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파르나스의 전설이 100년만에 부활하다2
3.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될 때 당신의 눈동자를 그리겠다
모자를 쓴 젊은 여인의 초상, 모딜리아니, 1917
현재 뉴욕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그림 속의 큰 모자를 쓰고 있는 여인은 모딜리아니의 부인, 잔느 에뷔테른(1898-1920)이다. 모딜리아니와 잔느는 1917년 러시아 조각가 차나 오를로프(Chana Orloff)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잔느는 “천국에서도 모델이 돼 주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모딜리아니에게 헌신적이었다. 3년여동안 하루 끼니조차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잔느의 사랑과 격려로 모딜리아니는 불안한 자의식을 예술적 작품으로 승화할 수 있었다.
모딜리아니와 잔느
그러나 잔느가 이렇게 세상에 제대로 알려진 것은 2000년 뉴욕에서 모딜리아니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모딜리아니와 그의 친구들 전’에 소개된 이후부터다.
자살, 잔느
가슴에 칼을 꽂고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자화상을 그린 잔느의 작품이다. 그녀는 18살에 열네살 연상인 32살의 모딜리아니를 만나 사랑하는 연인이자 모델이 되어, 자신의 그림처럼 모딜리아니의 마지막 생애 3년 동안 불꽃같은 삶을 함께했다.
잔느 에뷔테른 - 배경에 문이 있는 풍경, 모딜리아니, 1919-1920
이것은 모딜리아니가 죽기 얼마 전에, 둘째 아이를 임신한 잔느의 모습을 부드럽고 우아하게 표현한 것이다. 모딜리아니가 숨을 거둘 당시 임신 8개월이었던 잔느는 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견뎌내지 못하고 부모님 아파트 건물 6층에서 만삭의 몸으로 투신 자살을 했다.
잔느는 물었다.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아요?” 모딜리아니는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당신의 눈동자를 그리게 될 것이요”라고 대답했다.
4. 당신의 영혼이 해부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고, 그 앞에서는 마음속 깊숙한 어떠한 감정도 숨길 수 없음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눈은 우리 영혼의 창이다. 눈동자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변화무쌍한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입이 말하기 전에 눈동자는 이미 앞서 우리의 고통과 슬픔, 기쁨, 환희와 같은 모든 감정들을 여과없이 쏟아낸다.
그래서 모딜리아니는 상대방을 알지 못한 채 상대를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제대로 그리지 않았다. 인물의 인간성과 심리적 특징을 보여주기 위해 모딜리아니는 오히려 작품에서 비대칭으로 놓인 아몬드 모양의 눈을 그렸다. 또는 눈동자가 없이 눈을 그리거나, 한쪽 눈은 제대로 그리고 다른 쪽 눈은 색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검은 타이를 맨 여인, 모딜리아니, 1917
한편, “모델에게 느낀 서먹함이 모딜리아니로 하여금 눈동자를 그리지 못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이것이 상대의 눈동자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그의 나약함과 소극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심리학자들은 평하기도 한다. 세상의 얘기들이 자기 안에서만이 아니라 서로 바라보는 눈동자의 마주봄을 통해서도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딜리아니는 똑바로 직시하기 두려웠던 것 같다.
프란시스 카르고는 몽파르나스 전설을 기술한 전기 작가들 가운데의 한 사람이다. 그가 쓴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비극적인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문 속에서 “결점과 미덕, 불행과 이상적인 것에의 경도, 우아함과 장난기…이들 모든 것의 보상으로 모딜리아니는 채워질 수 없는 어떤 공허를 우리들에게 남겨 주었다”라고 매우 함축성 있는 말을 남겼다.
카르고가 말하는 ‘공허’란 사전적인 의미처럼 아무것도 없이 헛되고 텅 빈 것을 의미할까? 사람들의 마음 속에 늘 잠재하는 우수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반대로 살아가는 의미, 생명의 원천을 뜻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뭔가 채워지지 않는 인간적 향수를 느끼게 하는 모딜리아니의 작품속에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청춘을 추억하는데 필요한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소외 현상이 가속화되고, 사진술의 발명되었던 20세기 초에는 형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욕구가 한층 커졌던 시기였다. 그래서 모딜리아니처럼 사람을 주제로 초상화를 그린 경우는 드물었다. 즉 당시 미술에서 인간은 그저 하나의 오브제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인간의 존재감을 표현하기 위해 한 사람의 개성을 살리고 그 개성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었다. 모딜리아니가 왜 사람만을 그린 초상화에 매달렸을까?
정신적이고 서정적인 측면에서 오로지 인간만을 그렸던 모딜리아리를 “달콤하고 경쾌한 이탈리아어를 애용했고, 고향인 토스카나의 향수를 파리에 있으면서 잊은 적이 없으며, 콰트로첸토의 거장들의 예술을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했던, 어쩌면 고집스럽도록 순진했던 한 인간이었다”고 그와 절친한 사이였던 이리아 에렌부르크는 그의 「예술가의 운명」에서 회고했다.
그는 파리의 한 이방인으로서 살았던 모딜리아니를 추억하며, “모딜리아니는 예술만을 위해 순교한 공허한 이상의 모형도 아니며, 매우 현세적이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어린애처럼 솔직하고, 때론 응석도 부렸던 젊은이였다”고 덧붙였다.
어느 평론가는 “음주, 마약, 방랑 등이 모딜리아니의 예술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다고 성급하게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때로는 이러한 악덕이 오히려 한 예술가의 창조력에서 하나의 보상작용이 된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방종적인 삶에 솔직하고 충실했던 모딜리아니, 그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과연 어디를 응시하고 있는 것일까? 구체적인 현실을 떠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이상의 세계를 꿈꾸는가? 눈동자 없는 그들의 눈, 혹은 초점 없는 그들의 눈동자는 외부세계뿐만 아니라 내부 세계도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폴 기욤초상화, 모딜리아니, 1916
1907년 모딜리아니는 자신이 사용했던 스케치북에 직접 이렇게 적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현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현실도 아니다. 나는 무의식, 즉 인간의 본능이라는 신비를 알고 싶다.”
당시에 인간의 실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의 철학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베르그송은 그의 저서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에 기초하여 자신의 생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모딜리아니는 모델의 개성을 분석하고, 그 사람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세심하게 탐구함으로써, 인간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전체적인 인간성과 생명의 근원과 원천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모딜리아니는 세잔처럼 미술사의 흐름을 바꾼 혁명적인 작가도, 피카소처럼 어떤 미술 운동을 이끈 지도적인 작가도 아니다. 그는 그저 20세기 초 전위작가들과 나란히 작업하면서도 그들의 작업 세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지독하게 고수한 작가일 뿐이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화는 어느 것이나 모델과 꼭 닮았다. 이것은 물론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의 인물들과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다…그는 결코 디테일이나 외면적인 어떤 것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인간의 본성을 열어 보여준다”라는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그는 담담히 자신의 방식대로 사람들을 그렸다.
모딜리아니 초상화의 한 모델이었던, 그리고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 부부의 결혼서약서에 증인으로 서명하기도 했던 루냐 체코프스카는 당시의 모델로서 느낀 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당신의 영혼이 해부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고, 그 앞에서는 마음속 깊숙한 어떠한 감정도 숨길 수 없음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흰 옷깃의 여인(루냐 체코프스카),모딜리아니, 1917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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