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책을 앞선다 -3
알브레흐트 뒤러(Albrecht Dürer1471- 1528)
예수와 박사들(Jésus et les docteurs 1506)
목판유화 65,3 x 8v네미스자
여덟 명의 인물들 이외의 다른 배경이나 장식은 없다.노인들의 무시무시한 표정의 머리들과 조용하고 평안한 분위기의 어린 예수가 대비를 이룬다.예수가 주인공으로 그려졌지만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은 인간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기 위하여 지니고 있는,아니면과시용으로 사용하는아니면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책이 주인공이다.그 책의 내용을 박사들이 풀어 내지 못하고 난관에 봉착한 해석의 문제들을 주인공 예수가 풀어 주고 있는 장면이다.
각자 인물들은 무언극의 배우들처럼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 주연 배우 예수를 중심으로 주의 깊은 경청,놀라움과 초조감,노년의 멜랑콜리,분노,지적인 이해를, 여러 가지 감정의 굴곡을 얼굴표정으로 그려 준다.
작품의 한 가운데는 손들이 움직이고 손짓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있다.가운데 어린 예수는 입을열지 않았다.단지 손가락을 만져가며 말씀의 내용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이 손 짓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영원히 반복될 인간의 가장 원시적이며 가장 진솔한 대화의 방법이다.
예수의 표정은 요동치 않는 고요함을 보여 준다.하늘의 가르침을, 진리를 자유와 평안의 표정으로 자신의 확신의 틀에 갇혀 있는 자칭, 타칭 박사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다.
오른 쪽의 랍비는 머리 덮개가 없다.랍비들은 머리에 덮개를 올려야 한다.그는 책을 열어 놓고 있다 열린 페이지에는 평생을 해석과 주석에 보낸 연륜이 있다 그리고 책안에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의문들을여쭈어 볼 준비를 하고 있다.어린 예수는 손가락으로 말씀하나 하나를 짚어 가며 고집스러운 노인들의 물음에 답하고 있다.
당황하고 초조하기까지 해진 율법의 박사들은 책을 펼친채로 붙들고는 있지만 시선은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고 있다.대 부분의 박사들은 말씀에 대하여 경청하고 놀라면서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왼편 아래 랍비는 책을 들고 잇다.이 친구는 책을 아예 닫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아이 예수의 명철함에 놀라고 있다.
이 분의 이마 위 머리에는 오늘 읽고 외워야 할 말씀을 한 줄 붙여 놓고 있다.
책갈피에 종이 한 장에작품의 연도1506년이 그려졌다.연도아래는 화가의 사인이 그려져 있다.그리고 5일만에 그렸다OPUS QUINQUE DIERUM 고 작품에 기록하면서 자화자찬하고 있다..단 한 사람의 랍비만이 성경을 모두 암송하고 기억과 확신에 차서 손가락을 들고 예수와 논쟁을 벌이고 있다.하얀 머리 덮개를 올린 이 랍비는 어린 소년의 해석에 쉽게 동의할 수가 없다.확신에 거하는 자의 거대한 벽을 보여준다.다른 이들은 이 광경을 주목하고 경청할 따름이다.이 랍비의 얼굴은 악역을 맡아 괴기스럽고 추하다.스스로 세상의 스승이며 선택된 지도자로 허영과 교만과 오만함과 고집과 독선의 얼굴이다.
책은 원근법을 교과서대로 잘 묘사하고 있다.
중세에 유행하던 이분법적인 사고의 방식이 르네상스 시대에도 종교적인 그림에서는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아름다움과 추함,진리와 독선,자유와 속박,고요함과 분주함,순진함과 계략,젊음과 늙음,평안과 분노등의 대비가 극적으로 등장인물을 통하여 보여 진다.
깡뗑 메치스(Quentin Metsys 1466-1530)
전당포 부부.(Le Preteur et sa femme) 1514년 목판에 유화70,5 x 67 cm 빠리 루브르박물관
15세기 초반부터 유럽의 남부와 북부의 상업적인 교역은 은행가들과 상인들에게 부가 흘러 넘치게 하였다.놀랍도록 치밀하고 지적인 구성을 가지고 화가는 전당포 내부와 전당포 부부의 모습을 심각하게 감동적으로 담아 내고 있다.
그림의 구도는 앞에 테이블이 놓여있고 전당포 주인 부부가 앉아서 남자는 저울을 들고 있고 여자는 말씀책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뒤로는 선반이 놓인 장이 있다 그리고 오른 쪽으로 창문이 반쯤 열려 있어 나이 드신 어른과 모자를 쓴 젊은이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 준다.
테이블 위에 놓인 거울에는 한 사람이 책 읽기에 빠져 있고 창문을 통하여 건축과 나무와 종탑이 보여 진다.
테이블 위에는 황금 주화와 크리스탈 그릇과 진주 알들이 검은 천 주머니 위에 놓여 있고 말린 종이에는 붉은 색 녹색 보석이 박힌 반지들이 있다.
남자는 자기 앞에 흩어진 주화의 금의 무게를 달고 금의 함량을 살펴 보며 주화를 저울에 올려 놓고 심각하게 주목하며 자기 작업에 몰입하고 있다.남자가 돈을 만지고황금 주화를 저울에 다는 일은 프랑스나 이태리 스페인의 회화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돈을 만지는 일 자체가 천한일이든지 금기시 되는 사회에서 이와 같은 직업은 북 유럽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이 전당포 주인 남자는 상당한 부를 저울에 달고 있다.
여인은 기도문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한다.여인이 책을 읽는다.중세에 지적 활동에 종사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리는 일은 실제로 드문일이고 희귀한 일이기도하다.아마 이곳은 종교 개혁의 부산물로 여인들에게도 지식을 열어 주었던 것 같다.
아내는 자신이 잡고 있는 책의 페이지를 무심히 넘겨 가며 시선은 남편이 들고 있는 저울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여인은 시선으로 이미 책을 떠났다.여인이 잡고 있는 그림 책은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고 고급스럽게 장정이 되어 있다.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페이지마다 삽화가 칼러로 들어가 있다.당대에 좋은 책은 집 한 채 값을 상회하였다. 여인이 들고 있는 책의 열린 페이지에 왼쪽페이지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가 그려졌다.오른 쪽 페이지 글씨를 그린 형상으로 계시록의 어린 양이 그려져 있다.성경 책을 들고 있다고 또 신성한 말씀이 담긴 책을 들고 있다고 헌신적이고 신앙심이 깊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여인의 시선은 기도서를 벗어나 황금으로 향하고 있다.인간은 눈이 가는 곳에 마음이 따라 간다.인간의 신체중에 가장 먼저 유혹당하는 부분이 눈이다.
그림 앞의 둥근 거울 안에 나이든 인물은 빛이 들어 오는 찬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세상의물질이 중요하고 그림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잡고 있지만 인간의 삶이 황금으로만이 아니라 진리와 믿음의 신뢰를 바탕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거울을 통하여 보여 주고 있다.
가끔은 살아가면서 자신을 거울에 비쳐볼 필요가 있다.
저울은 단지 지상의 재물의 무게를 달고 그 부의 숫자를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저울만큼 인색하게 더 정확하게 마음이 가난하게 살아 가는 것을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저울이 달고 있는 것은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수 많은 성전의 문 앞에 새겨진 조각이나 그림에서 저울이 보여준 것은 파라다이스에 이르기 전에 영혼의 무게를 다는 엄숙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이 저울은 최후의 심판의 날에 달아 보는 영혼의 저울일 수도 있다.그리고 그림 속의 책은 진리를 담보하는 확실한 영적인 부유함을 보여 준다.금화나 보석이 주는 그 모든 것보다 더 무게가 나가는 진리 책의 무게가 화폭을 누르고 있다.15세기 말 번영하는 항구 도시 앤트워프에서 화가들의 길드의 대표가 되는 지위에 올라간 깡뗑메치스는 이 그림을 통하여 보다 정직하고 균형잡힌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교훈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조르주 드 라 뚜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불 빛이 있는 막달라 마리아〉La Madeleine à la Veilleuse) 유화1.28m×0.94m, 1640-45년
화려한 사교계에서 몸 팔던 여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만나용서 받고 변화되어 고행가운데 모든 물질적인 풍요에서 벗어나 명상에 잠긴 모습이다.
조르주 드 라 뚜르의 종교적 소재에 의한 일련의 어둠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밤과 침묵으로 부터 빛이 나오는 장면이다.어둠을 살아 본자가 빛의 실체를 안다.
화가는 이 단순한 명제를 작품의 정신적 성찰의 바탕으로 삼고 있다.
로렌 출신의 조르주 드 라 뚜르는 고대 예술의 이상이나 라파엘로의 르네상스의 영향력과 동떨어져서 뤼네빌에서 작업했다.
화가는 성공의 길을 택하지 않았고, 새로운 주제인 종교화 장르를 만든다. 1926년부터 루브르 박물관은 그의 몇몇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다. 이토록 뒤늦게 나타난 작품들로 인하여 작품의 위작 논란이 남아있다.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받은 조르쥐 드 라 뚜르는 인물들을 특별한 스타일로 강렬한 명암 가운데 놓는다.
촛불이 밝혀 주는 주변의 모습에서 먼저 자신을 태워 주변을 밝히는 불꽃 심지가 잠겨있는 유리컵을 볼 수 있다. 불꽃으로 주변은 형이상학화 되고 있다.여인은 맨발이다.머리결은 뒤로 가지런히 등뒤로 넘겨져 있다.머리는 왼손으로 받쳐주고 무릎위에 놓인 해골의 번쩍이는이마를 오른 손으로 쓰다듬고 있다,. 빛으로 인하여 곁에 놓인 책이 반사광으로 번쩍거린다. 골고다의 십자가를 미리 연상시키는 작업대에서 무엇인가 작업을 떠나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 나중에 다가올 예수의 장래 일을 미리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의 시선은 방향이 없다.
그녀의 시선은 흔들리는 촛불에 두지 않으며 책이나 해골에다가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것도 아니다.지상의 모든 사물의 허망한것과 하늘의 것에 대한 영원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고 있는 자세다 . 막달라 마리아는 이 세상에 뜻을 두지 않는다.
그녀에게 더 이상 책이 중요하지도않고 필요도 없다.책에 적혀 있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음성으로“네 죄가 용서되었다”는말씀을 이미 예수에게 직접들었고 신성한 빛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채웠다.
막달라 마리아의 옆 모습이 조명을 받아 빛을 내고 있으며 빛이 부드럽게 우리 몸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감동을 준다.
프랑스와 부쉐 와 샤르뎅은 그의 스승이었다.하지만 제자는 스승들을 뛰어 넘어 그의 새로운 주제로 자기망의 색채로 자신만의 붓질로 18세기의 프라고나르 회화를 만들어 낸다.
이 로코코의 걸작품에서 화가는 심각한 부드러움과 빛나는 우아함을 뿜어 내고 있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1732-
책 읽는 여인(La liseuse)유화 1770년, 워싱톤 내셔날 갤러리(Washington, National Gallery).
독서에 심취한 여인이 오른손으로 책을 쥐고 옆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이 아주 젊은 여인이 누구인지는알려져있지 않다.여인은 두텁고 부드러운 공단 방석을 등받이로 편안히 기대어 한 팔은 난간에 걸치고 햇빛 가득한 테라스에 앉아 있다.아니면 이 여인은 창문 앞에서 자연채광을 받으며 밝은 얼굴을 보이며 책을 읽고 있는 것 같다.여인의 등 뒤 벽위에 그림자가 얼룩져 있다.여인은 노란 레몬빛 의상을 걸치고 있다.특별히 프라고나르가 즐겨 사용하던 노랑색은 놀랍게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가져다 준다.가슴과 목 부위를 장식하는 보라빛 리본과 머리 위를 묶고 있는 장식이 도드라지게 드러난다.방석도 같은 보라빛 반사광을 던져 주고 있다.보라 빛과 노랑은 보색관계로 서로 빛을 발하며 놀라운 빛을 만들어 가며 더 강렬하게 시선을 잡는다.
남프랑스 그라스 출신의 프라고나르는 붓이 빠르고 즉흥적이며 행복을 호흡하는 주제들을좋아하였다.남부의 투명하고 따뜻한 빛을 담고 있는 주제를 그리고 반짝거리며 영롱한 색채를 표현하였다.그는 몰락해 가는 시기의 마지막 화가다.가벼운 풍속화나 가족적인 내밀함을 알리는 사소한 일상의 행복하고 무사태평한 이야기는 이제 혁명의 잔인한 시대에는 사라져야 한다.이제 시대는 고전으로 돌아가야 한다.프라고나르의 회화의 인물들은 당분간 모습을 숨겨야 한다.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어야 한다.
프라고나르의 여인이 다시 책을 읽으려면 한 세기를 기다려야 한다.
(다음 주에 이어서...)
사계절 옥탑방에서 테오 -2016년 정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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